책을 읽을 때 나만의 규칙이 있었다. 모서리를 접지 않는다, 책 위에 커피잔을 놓지 않는다, 절대 냄비 받침으로 쓰지 않는다, 그리고 밑줄을 긋지 않는다, 이다.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책을 돌려가며 읽고 자주 도서관을 이용했다. 빌린 책을 읽다 보면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귀퉁이에 짧은 메모가 적혀있는 그것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밑줄을 긋고 싶은 곳에 이미 줄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 문장을 발견하면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한 착각이 들고 동료애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밑줄을 긋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쳐보면서도 나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지키고 싶었다. 알량한 자존심이거나 허세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즈음은 거의 내 책으로 읽는다. 욕심내지 않고 한 권이라도 꼼꼼히 읽느라 시간이 걸린다. 독서 방법도 바뀌어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단어와 행간의 의미를 음미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지 않던 밑줄 긋기를 시작했다.
밑줄을 긋는 특별한 기준은 없다. 심오한 철학이나 멋있는 문장에 줄을 긋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나와 같은 생각하는 작가가 신기해서 감탄하면서 밑줄을 긋고, 어느 날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의 신선함과 생경함에 줄을 긋는다.
줄을 그을 때는 연필을 사용한다. 연필심이 너무 뾰족하여 거슬리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물러서 아랫줄까지 침범하지도 않는 적당히 뭉툭하고 부드럽게 그어지는 것이 좋다. 연필이 종이와 닿을 때 사각거리는 소리와 감촉을 즐긴다.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왜 이 부분에 줄을 그었을까 하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문장도 있다. 조사 한 글자에만 밑줄을 그어 놓기도 하고 서술어에만 줄을 진하게 그어 놓은 것도 있다.
김훈 작가는 소설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한 문장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처음에는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담배 한 갑을 태우고 ‘꽃이 피었다’라고 적었다. 작가가 ‘은’이 ‘이’가 된 연유를 밝히길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라고 밝혔다. 작가는 사실의 세계를 가지런히 밝히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고 전했다.
최근에 읽은 문장 중 “여름은 빛나고 우리들의 사랑은 시든다”에 밑줄을 그었다. ‘은’ 과 ‘시든다’에는 진하게 한 번 더 줄을 쳤다. 작가의 마음을 따라가기도 하고 전혀 다른 감정을 대입해 보기도 하는 낱말 놀이를 하며 밑줄 긋는 호사를 누린다.
여름에도 우리들의 사랑은 추웠다, 여름이 오면 우리들의 사랑도 짙어질까, 여름도 빛나고 우리들의 사랑도 빛난다, 여름조차 빛나는데 우리들의 사랑은 저물어간다.
하찮게 생각했던 조사 하나만 바꿔도 감정의 농도와 밀도가 미묘하게 달리 느껴진다. 때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내는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이다. 주연보다 한방이 있는 조연의 쓰임을 알게 되니 은밀한 세계를 알아차린 듯 뿌듯하다.
작고, 여리고, 놓쳐버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들꽃의 이쁨에 끌리고 무더운 여름 한 줄기 바람에도 감사하다. 소소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도 결코 그렇지 않음을 지나온 삶이 보여주었다. 사소한 것에 기쁘고 하찮은 것에 서운하다. 우리의 마음도 ‘조사’만큼 작은 하나에 일렁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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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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