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는 천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모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장씨는 중인인 역관의 딸이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어서 장씨의 신분 또한 천민일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운명대로라면 양반의 첩이나 될 팔자였다.
하지만 장씨는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대궐에 궁인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선택한다. 장씨는 스물한 살이었던 1680년 숙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는다. 1688년에는 왕자(훗날 경종)를 낳았고 이듬해 중전이 됐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천민이 왕비에 책봉된 것은 장씨가 유일했다. 그러나 꽃도 오래되면 시든다고 했던가.
서른을 넘어서면서 미모가 예전 같지 않았던데다 당쟁으로 남인들이 실각하며 장씨는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1701년에는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장씨의 아들 경종은 왕이 된 지 3년째인 1722년 기구한 삶을 살다 간 어머니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고 지금의 서울 낙원동에 대빈궁이라는 사당을 세웠다.
왕을 낳은 후궁을 위한 조선시대의 첫 사당이다. 왕을 낳았지만 후궁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따로 사당에 모신 것이다.
경복궁에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이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2년 뒤다. 1724년 영조는 즉위 첫해에 무수리 출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지었다. 처음에는 숙빈묘라 했으나 1753년 육상궁으로 승격시켰다. 영조는 육상궁 재실 현판을 직접 내리고 자신의 어진을 걸어두었다. 육상궁 안에는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연호궁도 들어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나란히 모셔져 있는 셈이다. 1908년에는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저경궁(선조 후궁 인빈 김씨)과 대빈궁, 선희궁(영조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정조 후궁 수빈 박씨)을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고종 후궁 귀비 엄씨)까지 이전해 칠궁이 됐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고종이 경우궁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1968년에는 북한 간첩들이 칠궁 옆을 통해 청와대를 기습하려 한 사건이 발생해 이후 33년간 민간인 관람이 금지되기도 했다.
새해부터는 칠궁 관람시간이 대폭 확대된다는 소식이다. 경복궁관리소에 따르면 새해부터 화~토요일 관람 횟수가 1일 5회에서 7회로 늘어난다. 잠시 짬을 내서 조선왕실의 사랑과 아픔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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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수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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