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법원의 한 여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치매 환자의 법적후견인 임명 소송 사건을 재판하고 있는데 법원심사관을 다시 맡아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니, “수상한 사람들이 너싱홈에 계속 찾아와 환자로부터 재산 위임장을 받아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은행 계좌 거래 법원 금지 명령이나 재정 기록 공개 명령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덧붙혔다. 판사 서기로부터 소송 기록을 넘겨받았다.
법원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치매환자를 대변하는 법원임명변호인과 함께 너싱홈을 찾았다. 이마에 작은 혹이 있는 80대 후반의 이태리계 할아버지였다. 처음에는 좀 두려워했지만 곧 말문이 터진 할아버지는 본인이 은퇴한 엔지니어이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인 1940년대 말에 한국에서 미군 소속으로 군복무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배우자는 없었고 자식도 없어, 지금은 고인이 된 형과 함께 한평생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치매로 인해 심한 기억 장애를 겪고 있었고, 심지어 몇십분전 대화 내용도 거듭 되묻곤 했다. 공간감각 상실로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셨고, 너싱홈을 끝까지 은행이라고 우겼다. 교활한 악인들이 접근하면 쉽게 이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판사의 요청에 따라 법원 임명 변호인과 함께 필요한 서류를 찾으러 할아버지 집을 방문했다. 판사가 “집안을 수색할 때 혹시 총기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 하여 처음에는 웃어 넘겼지만,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들어가면서 나무 바닥의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그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집안 내부로 들어간 우리의 눈앞에는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 모든 층과 방 내부에는 쓰레기더미와 잡동사니들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영어로는 “호더”라고 하는 저장강박증을 앓는 환자 집 같았다. 벽 페인트는 주르륵 벗겨져 내려 오고 있었고, 때묻은 속옷들은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십여년 전에 죽은 형이 사용했던 침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바닥에 흐트러진 고인의 유품 위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증거 자료용 사진을 찍고, 유언장, 은행 서류, 출생증명서 등을 부랴부랴 챙긴 후 집에서 속히 빠져나왔다. 더 오래 머물면 폐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우리가 떠난 후 쓰레기더미에 불똥이라고 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의 친척, 사회복지사, 친구, 목회자, 은행장, 변호사, 병원직원 및 주변 이웃들을 모두 인터뷰하고 법무사들의 도움으로 재산 추적 조사를 해보니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외롭게 사셨던 할아버지의 총재산은 최소한 350만달러였다. 백만장자 할아버지는 큰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거지처럼 쓰레기더미를 안고 사는 독거노인이었던 것이었다. 위임장을 받으려고 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은 일부 친척들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너싱홈에서 환자의 법적 서류 서명을 시도했기 때문에 법원으로 불려가게 된 것이었다.
법원출석일에는 마음씨 착한 조카 한 명을 할아버지의 임시 후견인으로 추천했다. 판사는 추천을 받아들였고, 너싱홈에서 집으로 퇴원하여 24시간 사립 홈케어 간병인을 마련할 수 있도록 법원 승인도 내려졌다. 이 와중에, 너싱홈으로부터 오늘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의 심장이 마비되어 신속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허무했다.
<
최태양/ 변호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