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생활을 시작한지 1년 남짓 된 미국인 조교수가 2개월 전 학과 전체 교수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학계를 떠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현재 다른 산업분야의 자리에 지원해 인터뷰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아직 결과는 모르지만 결과에 따라 이르면 1월, 늦어도 2016년 5월에는 학교를 떠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채용 제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직 인터뷰도 안한 상태에서 동료 교수들에게 알리는 것은 이례적이었고, 그 타이밍 역시 학사연도 끝이 아니라 새 학기 중반이라 이메일은 좀 충격적이었다. 미국대학의 조교수 생활은 고되기로 악명이 높다. 그 1년 동안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고 우울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쉬운 과정이 아니기에 이해 못할 결정은 아니지만, 다음 행보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쥐고 있던 카드를 먼저 내놓는다는 것은 한인인 나에게는 꽤나 극단적인 선택 같아 보였다.
나름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을 계기로 최근 많은 교육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Grit’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투지, 기개, 근성 정도로 번역되는 ‘Grit’은 앤젤라 덕워스(Angela Duckworth) 교수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TED에도 소개되어 미국 교육학계에서는 학생들의 성취도 향상을 위한 심리적 특징으로 연구되고 있다. 기존의 자기 조절능력 등과 비슷한 측면도 많아 아직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전통적으로 불굴의 의지와 끈기, 근성을 강조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친근한 심리적 특성이 아닌가 싶다.
동료 교수가 투지나 근성이 부족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끈질기게 매달리는 근성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사회적 약자들의 어려움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게 된다는 일각의 우려에도 의견을 같이 한다.
근성보다는 어떤 일을 성취하려는 동기가 더 중요할 수가 있고, 내적 동기유발과 상관없이 근성이 발휘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 유난히 근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나는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어쩌면 동료 교수는 근성보다 내적동기에 집중하는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결정이 가능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 서울대생 한명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라는 유서를 쓰고, 안타깝게도 생존에 대한 근성을 버렸다. 미국인 조교수가 힘든 교수직을 계속 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듯이, 서울대생으로서 사회적으로 감탄 받는 성공만이 생존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더라면, 뭔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다른 길에 대한 근성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안타깝다.
상위 3% 이내인 서울대생이 열심히 해도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내적 동기와 상관없이 개인의 근성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냉정한 현실이 된다. 다가오는 2016년 새해에는 젊은이들이 이 사회에서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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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승 매릴랜드대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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