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년 보내고 묻힌 스위스 작은 마을… 여전히 단체 관광객 방문 활기
▶ ‘너무 상업화’유가족 기념품 회수로 추모박물관 문 닫은 후 마을과 갈등
어느 날이든 스위스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 톨로체나즈는 활기가 넘쳐흐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배우 중 한명인 오드리 헵번의 소박한 십자가가 세워진 묘지를 보기위해 찾아오는 단체 관광객들을 하나 가득 실은 버스가 매일매일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로마의 휴일’ 등에 출연하며 오스카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크린의 전설 헵번은 생의 마지막 30년을 제네바에서 30마일 떨어진 인구 1,800명의 이곳 작은 마을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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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암으로 사망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살던 집 앞 건너편의 마을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묘지는 지금도 매년 수천명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에 그녀는 화려한 스타라기보다는 우아했던 이웃,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던 지칠 줄 모르는 인도주의자로 남아있다.
“그녀는 한 번도 명사처럼 굴지 않았지요. 언제나 소박했고 다정했어요”라고 생전의 헵번이 마을을 산책하거나 인근 타운에 쇼핑가는 것을 자주 보았던 이웃주민 크리스틴 드몬트는 말했다.
헵번이 사망하고 몇 년 후 마을 일부 주민들과 헵번의 두 아들, 숀 퍼러와 루카 도티 사이에서 다툼이 생겼다. 갈등의 중심은 헵번을 추모하는 작은 박물관으로 교실 두 개짜리 옛 마을 학교를 개조해 헵번의 배우 생활과 유니세프 대사 활동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이었다.
아들들은 아카데미 상 트로피, 사진들,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 등 어머니관련 기념품들을 기증했다. 영구기증이 아니라 5년 동안 한시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빌려준 것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나 기념품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자 열심히 박물관 설립을 주도해왔던 일부주민들이 분노한 것이다. 헵번 관련 전시품들이 없으면 애써 세운 박물관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메모리가 지나치게 상업화된다고 생각해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박물관에선 ‘오드리 헵번 초콜렛’이나 헵번의 정원에서 자란 라벤더 등을 팔았다. 당시 큰 아들 숀 퍼러는 “이 모든 게 도를 넘어섰다”고 마을 주민들에게 말했다.
주민들은 판매수익은 모두 헵번이 살아있다면 허용했을 다양한 어린이 자선사업에 기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갈등만 심해진 채 결국 2002년 박물관은 문을 닫았고 당시의 불만은 아직도 이 작은 마을의 의견을 양분시키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아들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지지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당하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오드리를 기리는 박물관 설립을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 허사가 되어 버렸다”고 마리 오버슨은 분개한다.
헵번을 위해 예전의 갈등을 풀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면서 박물관 폐관 10년이 지난 후 주민들은 다시 헵번을 추모하는 자리에 함께 모였다. 아들들이 마을에 선사한 헵번의 조각상을 제막하는 자리였다.
박물관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화제에 오르긴 하지만 헵번이 “나의 홈”이라고 부르며 사랑했던 스위스 작은 마을에 그녀가 남긴 유산은 청동 조각상과 소박한 묘지, 그리고 따뜻한 추억만으로도 전혀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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