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이 아침, 눈을 뜬다. 하얀 천장, 미색 커튼 사이로 연하게 스며드는 아침 햇살, 위이잉… 가늘게 들려오는 히터 돌아가는 소리. 따뜻한 이불속. 모든 것이 어제 잠이 들때와 같다.
죽음처럼, 그 신비한 잠속에서 몇시간을 노닐다가 다시 발 딛고 사는 이승으로 돌아왔다. 죽음이란 어떤 걸까? 내 몸에, 내 마음에, 내 방에, 세상과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어 몇시간이 흘렀는지,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완벽한 무위의 존재가 되어, 속수무책인, 잠과도 흡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깔닥 고개를 넘어가는 순간만 힘겹고 두려울 뿐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한게 죽음이 아닐까?
때론 그 오묘로운 시간속에서 꿈을 꾸며 그리던 이들과 뜻밖의 조우를 하기도 하고, 때론 날고 싶었지만 끝끝내 못날고 만 그 푸른 창공을 새처럼 날아다니기도 하고. 며칠 전엔 반가운 이들과 둘러앉아 노닥이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오늘, 새아침이란다. 떡국이 애타게 기다려졌던 어린 시절이 까마득히 지나고 나서 이젠 더 이상 새해라는 날짜에 설레지 않는다.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오늘, 새해 아침.
나이드는 게 신비롭고 재미있기까지 하다면 노망이라고 할것인가? 생에 대한 노인의 집착이라 할까?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 무지했었는지. 모든 게 그냥 나 인줄 알았더니 나란 존재는 많은 부분을 물속에 숨긴채 아주 작은 끝부분만 수면위에 내놓고 평화로운 모양새로 지나가는 배들에게 손짓하는 바닷속 암초같다.
자신에게 그토록 무지하였음은 나이가 먹어서만 깨닫게 되나보다. 무지함 때문에 애들을 오지게 패고 구박한 못난 어미처럼 과거의 내 삶의 행로에서 힘겹게 허덕이던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게 미안해진다. 손자가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단순한 기쁨과 따뜻한 희열을 넘어 나 라는 한 존재의 완성과정에서 찾지 못했던 몇 조각의 퍼즐을 찾아 맞추는 작업과도 같았다.
아아, 내가 그래서 그랬었구나, 내가 그걸 원했었구나, 그게 갖고 싶은데 갖을 길이 없어서 택한 편법이 그런 행동을 낳았구나.. 그런 발견은 이제 조용한 희열과 안정을 준다. 나는 언제나 나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지 아는 줄 알았었다. 내 몸은 내 것인줄 알았고, 내 맘대로 부리면 내 맘대로 따라주는 것인줄 알았던 젊음의 그 오만! 이제 지금은 무슨 일을 하려면 우선 내 몸에게 공손히 청을 드린다.
‘몸님,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저지르고 싶은데 너그럽게 협조해 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내키지 않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다가서면 내 마음에게 간곡한 청을 넣는다.
‘마음님, 아니꼽게 생각하시는 건 잘 알지만 이번엔 그냥 조용히 넘겨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젊은 이들의 눈에는 그저 고목같이 보일 이 나이의 인생도, 그러나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만개하며 잎을 떨구고 빈가지되어 해동을 기다리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싸이클이 있다.
멈추지 않는 이 성장은 관뚜껑에 못박히는 순간까지 계속 될 것이다. 눈만 뜨면 감겨드는 기운이 황소같은 손자녀석이 연말에 외갓집에 가느라 일주일을 비웠다.
늘 힘겹기는 하지만 그에 못잖은 기쁨이었기도 해서 내심 그 애의 부재동안 주책같은 할미가 방안을 서성이며 아무데나 까탈을 부리까봐 걱정했는데, 어마나, 문득 문득 생각은 나지만 내 삶의 리듬에는 전혀 영향이 없네! 멀고 가까움이 다를바 없음의 이 자유로움. 청명한 이 아침, 연둣빛 새순으로 손 내미는 오늘을 바라보며… 나이 드는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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