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서울 단풍은 예년보다 늦었다. 다른 해 같으면 11월 중순이면 낙엽이 대부분 떨어졌을 때인데 이번에는 아직도 노랗게 물들지 않은 은행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미국에서도 동부나 로키 산맥 근처에 가면 단풍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 단풍은 넓고 큰 미국을 닮아 광대하기는 하지만 한국 단풍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없다. 아마도 단풍의 아름다움으로 따지면 한국을 능가할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단풍의 명소로 으뜸을 꼽자면 오대산과 내장산을 들고 싶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단풍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온갖 색이 뒤섞이고 계곡 물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다.
10월 중순이 절정인 오대산과는 달리 내장산 단풍은 11월 초가 돼야 제대로 물이 든다. 총천연색의 오대산과는 달리 내장산은 붉은 아기 단풍이 주종을 이룬다. 하지만 나무마다 붉기의 정도가 다르다. 파랑이 섞인 빨강부터 연분홍에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진홍에 이르기까지 빨강의 종류가 이토록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이 몰려오기 이전 이른 아침 이슬 품은 단풍잎이 햇살에 빛나는 모습은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 할 장관이다.
단풍의 빨간 색은 안토시아닌이란 성분 때문인데 이는 독성이 있어 다른 나무들이 단풍나무 근처에서 자라는 것을 막아 준다. 인간이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식물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생존 경쟁의 수단인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학술 용어로는 ‘어포토우시스(apoptosis)’라 부른다. 이는 세포학에서도 쓰는 단어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세포는 때가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것이 어포토우시스다. 죽음을 알리는 메신저가 도착하면 세포는 자발적으로 해체 작업에 들어가고 이렇게 해체된 세포는 시체 처리 반에 의해 나뉘어져 새 세포의 원료로 쓰이게 된다.
태아 때 한데 뭉쳐 있던 손가락이 다섯 개로 갈라지는 것도 그 사이에 있던 세포들이 자진해서 죽어주기 때문이다. 세포의 자살은 인간이 성장하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된다. 보통 인간의 경우 하루 평균 500억에서 700억 개의 세포가 이렇게 죽고 생성된다.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질병인 암은 죽어야 할 세포가 죽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든 고등 생명체의 세포에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지시 테이프처럼 자기 파괴 장치가 장착돼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고등 생명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셈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태어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연은 어째서 이런 가혹한 장치를 마련했을까.
세포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외부의 충격으로 마모되거나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이를 방치하거나 수리하는 것보다 이를 해체시켜 새로운 세포의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개체 보존에 유리하다고 대자연은 판단한 모양이다. 개체 전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낡고 병들고 망가질 개체라면 이를 땜질할 것이 아니라 자손을 남기고 해체시켜 새 생명 탄생의 재료로 쓰는 것이 효과적이다.
떨어진 낙엽은 죽은 것 같지만 그 성분은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무에 흡수돼 내년 봄 싱그럽게 돋아날 새싹의 원료가 된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분도 인간이 죽은 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새 생명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낙엽도, 인간의 죽음도 세상을 언제나 새롭게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필연적인 대가인 셈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여전히 진리다.
늦가을 낙엽 지는 단풍 숲은 그 빛나는 화려함과 함께 삶과 죽음과의 깊은 관계를 조용히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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