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서 200달러 들고 미국에 온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 34세때 76세 존슨 회장과 결혼, 하녀에서 3번째 부인으로
▶ 5억달러 상속 둘러싸고 전처소생 자녀들과 세기의 재판
200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와 억만장자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다 이 억만장자의 3번째 부인이 되었던 존슨앤드존슨 그룹 미망인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이 지난 1일 폴란드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가족들이 4일 밝혔다. 향년 76세.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도미했던 폴란드 시골 농부의 딸 바바라 피아세카의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는 42년 연상인 남편의 사후 전처소생 자녀들과 피터지게 싸웠던 유산 소송이 미 전국의 뉴스로 조명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었다. 한 전기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 사상 “가장 거액의 재산을 둘러싼, 가장 경비가 많이 든, 가장 추악한 유산상속 싸움”이었다.
폴란드의 대학에서 미술사와 철학을 전공한 바바라 피아세카는 1968년 미국에 도착하여 초라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뮤지엄이나 폴란드계 신문사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던 그녀는 호텔에서 일하던 한 폴란드인 청소부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 청소부는 숙식이 무료제공 되는 가정부로 일하는 것이 경제적일 뿐 아니라 영어를 배우는데도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처음 폴란드계 가정에서 일하다 몇 군데 추천을 거쳐 요리사로 취직된 곳이 밴드에이드와 베이비파우더로 유명한 존슨앤드존슨 그룹의 상속자 J. 스워드 존슨 시니어의 저택이었다. 신통치 않은 요리 실력이 드러나면서 당시 안주인 에스더 존슨은 바바라의 직책을 하녀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무렵 바바라와 존슨 시니어의 염문도 시작되고 있었다.
이듬해 그녀는 저택을 나와 뉴욕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맨해튼 아파트를 사준 존슨 시니어는 곧 아파트에 들어와 동거를 시작했고 32년 동안 지속되어온 존슨의 두 번째 결혼생활은 파경에 이르렀다.
1971년 두번째 부인과 이혼한 존슨 시니어는 8일 만에 바바라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존슨의 전처소생 6명 자녀 중 그 누구도 초대되지 않은 결혼식이었다.
당시 존슨 시니어는 76세, 바바라는 34세였다.
12년 결혼생활 동안 미술사 전공의 바바라는 렘브란트, 보티첼리, 라파엘을 비롯한 미술품 수집에 열중했으며 남편과 함께 프린스턴에 140 에이커 규모의 장원을 조성해 저택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폴란드어로 ‘빛나는 숲속의 빈터’란 뜻을 가진 ‘자스나 폴라나’라고 명명된 이 저택은 시가 2천~3천만 달러로 지금은 골프클럽이 되어 있다.
1983년 존슨 시니어가 숨지면서 20세기 최고의 소프 오페라의 하나로 꼽히는 유산상속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존슨 시니어는 재산의 대부분인 5억달러를 바바라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상속에서 제외된 자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6명의 자녀들은 모두 고인이 생전에 그들을 위해 설립해둔 신탁재산으로 이미 백만장자들이었지만 새 유언장은 아버지가 노환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계모의 조종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계모가 늙고 병든 존슨 시니어를 위협해 자신에게 유리한 유언장을 쓰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바바라 측은 남편이 탐욕스럽고 가증스러운 자식들에게 신물이 나 유산을 주지 않은 것이라고 맞서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재판은 3년을 끌었다. 소송비용만도 2,400만 달러를 넘어섰고 산더미 같은 법정 서류와 수많은 증인들의 엇갈리는 증언들은 미국 최고 부호 중 하나인 존슨가문의 불행한 사생활 단면을 만 천하에 공개했다.
한쪽 증인들은 바바라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늙고 병든 남편을 악을 써대 가며 구박했다고 말했고 다른 쪽 증인들은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부부였으며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던 무렵의 존슨 시니어는 정신이 말짱했다고 단언했다.
증언들만으로는 바바라의 모습조차 종잡기 힘들었다. 따뜻하고 순수하며, 한결같고 관대하고 온순한, 마지막까지 남편 곁을 지킨 충실한 반려자라는 어느 날의 찬사는 다음날 다른 증인들에 의해 잔인하고 교활하며,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포악해 병든 남편 곁에서 캐달로그나 뒤적이던 악처로 뒤바뀌기 일쑤였다.
유언장을 새로 작성한 변호사가 바바라의 친구였다고 자녀측 변호사는 공격했으며 바바라 측 변호사는 담당판사가 자녀들 측에 노골적으로 편향되었다면서 자진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싸움은 배심원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합의되었다. 소송이 제기된 지 3년만인 1986년이었다. 상속 유산의 대부분인 3억 달러는 바바라에게 돌아갔으나 자녀들도 4,000만 달러를 받았고 존슨 시니어가 설립했던 해양학 연구소에도 2,000만 달러가 돌아갔다. 소송 당사자 모두가 자신들의 승리라고 자축했지만 최대 승자는 물론 바바라였다.
바바라 자신이 “미국의 지옥‘이라고 표현했던 추악한 소송에서 승리한 그녀가 무일푼의 하녀에서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여성 가운데 한 명, ‘현대판 신데렐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녀는 고향인 폴란드에서 여생을 보내며 미술 작품을 사들이는데 열정을 쏟았다.
수집한 작품은 자신이 설립한 바바라 피아세카 존슨 재단에 기증했고, 재단은 작품 판매 수익으로 폴란드 미국유학생, 너싱홈과 싱글엄마, 자폐증 환자 등을 돕고 있다.
존슨여사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폴란드 브로츠와브에 묻힐 예정이다.
<뉴욕타임스-본보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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