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까마득한 이야기 같지만 세계 경제가 힘차게 동반 성장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이겨낸 미국과 서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은 80년대 들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그 중에서도 제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 불황다운 불황을 겪지 않고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일본의 모습은 놀라웠다. 89년 말 니케이 주가 지수는 4만 선을 바라보고 도쿄 시내 부동산 값이 가주 전체를 능가했다. 그 해 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독일이 통일되고 곧 이어 소련이 무너지면서 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서방 국가의 승리는 완벽해 보였다. 장기 호황이 계속되자 ‘이제 불황이란 용어는 사전에서 사라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90년대 초까지 ‘대형 경기’를 자랑하던 일본은 지금 20년째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2009년 초 7,000선까지 떨어졌던 니케이 지수는 이제 많이 회복돼 1만 선을 턱걸이 하고 있다. 더 기막힌 것은 불황이 이토록 오래 계속됐는데도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도 이렇게 길지는 않았다.
얼마 전까지 세계 경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이보다는 조금 더 갔다. 90년대 말에는 하이텍, 2007년까지는 부동산 붐 덕분에 그럭저럭 호경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둘 다 통화 팽창과 주식 및 부동산 버블에 의한 인위적 호황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후 6년이 지났고 숫자로는 불황을 벗어났다는데 일반인들 가운데 경기 회복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일본과 함께 세계 3대 경제권이던 서유럽도 2011년 그리스를 필두로 한 남유럽의 재정 파탄으로 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스페인 같은 곳은 청년 인구의 절반이 실업자다. 서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면서 사회 복지 예산은 전 세계의 절반을 쓰는 곳이다. 이번 재정 위기가 과도한 복지비용으로 인한 것인데 고령자 인구는 계속 늘고 이를 부양할 젊은 노동 인구는 주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지 해답이 없다. 세계 선진국이 동시에 이토록 심한 불황을 오랫동안 함께 겪은 적은 거의 없다. 이는 이번 동반 불황이 보통 불황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들 나라가 짧게는 2차 대전 이후, 길게는 19세기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한 것은 이들의 뛰어난 기술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기술은 새로 개발하기는 힘들지만 흉내 내기는 쉬운 특징을 갖고 있다.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투자 자본은 값싼 인건비를 찾아 저개발국으로 이동하기 마련이고 이와 함께 기술 이전은 필연이다. 이렇게 기술을 배운 신흥국이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독자적인 물건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1989년 이전까지 동유럽과 구소련,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 등 광대한 지역이 사회주의 이념에 발목이 잡혀 있었지만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이런 족쇄는 풀렸다.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이들 시장을 파고들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한국은 일찍이 이 길을 택해 1인당 GDP 70달러에서 2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이제는 베트남과 태국,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모든 동남아 국가와 브라질을 선두로 하는 라틴 아메리카, 심지어 일부 아프리카 국가까지 이 길을 가고 있다.
IMF는 작년 신흥국 투자 규모가 8조7,000억달러로, 선진국 8조3,000억달러를 사상 처음 추월했다고 밝혔다. 올해 신흥국의 경제 규모는 44조1,240억달러로 선진국 42조7,120억달러를 역시 처음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는 영원히 앞서 가는 승자도 영원히 꼴찌만 하는 패자도 없다. 남보다 좀 더 땀 흘리는 사람이 남보다 조금 정상에 더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신흥국 경제의 선진국 추월은 산업혁명 이후 200년 간 서방이 주도하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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