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비비며 놀고 있는 자잘하고 맑은 소리, 강 건너 강골 이씨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쪽 대실로 마실 나온 바람이 잠시 머무는 소리, 그러다가도 허리가 휘어질 만큼 성이 나서 잎사귀 낱낱의 푸른 날을 번뜩이며 몸을 솟구치는 소리, 그런가 하면 아무 뜻없이 심심하여 제 이파리나 흔들어 보는 소리, 그리고 달도 없는 깊은 밤 제 몸속의 적막을 퉁소 삼아 불어 내는 한숨 소리, 그 소리에 섞여 별의 무리가 우수수 대밭에 떨어지는 소리
(최명희의 대하소설‘혼불’중에서 대숲에 일고 있는 바람 소리)
매일 매일을 주어진 시간 속에서 바삐 지내다 보니 자주 가지는 못하여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바다와 강(江)을 동경한다.
미국에 와서는 강 대신 바다로 많이 나가는데 그 중에 갈대 사진을 찍기 위해 잘 가는 곳이 에봇 라군 비치(Abbots Lagoon Beach)이다.
바닷가로 향한 길을 걷다 보면 드넓은 갈대밭을 만나게 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쓸리는 갈대밭에 들어가 있으면 온통 술렁이는 소리가 갈대 숲에 가득하다. 최명희 작가의 표현대로 그 소리가 마치‘적막을 퉁소 삼아 불어대는 한숨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갈대 숲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솨아 하는 소리만 듣고도 바람의 소리를 구별 할 수 있다. 지금 바람이 오는 소리인지, 지나가는 소리인지, 아니면 막 내 머릿결을 쓰다듬고 가는 소리인지 구별할 수가 있다. 그러한 소리들을 뒤로 한 채 바닷가로 나가면 뒤채이는 파도와 일렁이는 수면 위에 반짝이는 빛을 대하며 마음이 차분해 지곤 한다.
며칠 전에는 지인 한 분이 나의 어떤 면을 보았는지 그 분이 알고 있는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며 의아해 하셨다..’내가 아는 나’,‘나도 모르는 나’,‘남이 아는 나’,‘남도 모르는 나’가 서로 얽히고 설키어 한 인간의 성격을 형성한다고 할 때 그런 점에서 보면 나 역시 나도 모르는 내가 너무나 내 속에 많기 때문일것이다..
그러나 강물은 흔들리며 흘러가지만 여전히 반짝이고 있고, 갈대 역시 늘상 바람에 이리저리 몰리면서 눕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서듯이 내 속에 있는 본래의 모습은 그대로 있다고 자신을 추스린다.
지난 8월에 알래스카를 갔다 왔다. 알래스카로 가는 배가 떠나는 시애틀로 15시간 이상 운전을 하고 갔었고 돌아올 적에는 앰트랙(Amtrak)을 타고 내려 오는 코스를 택하였다.
시애틀에서 이곳 마티네즈까지 22시간 동안 앰트랙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우리가 늘상 볼 수 있는 고속도로 주변의 풍경이 아닌 산과 들과 강을 끝 없이 볼 수 있어 좋았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도도히 흐르는 한강과 남한강, 섬진강 등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조국의 강들이 그리웠다. 특히 끊어질듯 이어지는 강 줄기를 같이 따라 내려가며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충주에서의 남한강이 떠 올랐다.
서울에서 충주로 직장을 옮기신 아버지를 따라 나는 충주 목행동에서 4학년 부터 6학년까지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은 서울 가시나를 남한강변으로 방과 후에 자주 데리고 나갔는데 반짝이는 강물의 신비로움을 기억한다. 친구들과 강변에서 놀다보면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우리는 소나기를 피해 쏜살같이 뛰던 기억과 얕은 강가에서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슬기를 잡는다고 어린 나이에 설치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해는 기울어 강변의 갈대밭 너머로 지던 저녁 노을을 등에 이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유년의 기억이 내게 아름다운 그림책처럼 남아있다.
나이를 먹어가도 각자의 마음 속에는 그리움과 사랑하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그 기억들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오랫 만에 주말에는 친구들과 바닷가로 나갔다 와야겠다. 그곳에서 서걱거리는 갈대소리와 파도소리와 그리고 서성거리는 마음의 소리도 담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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