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여전히 영화 욕심이 있습니다. 만약 영화 소재가 넘쳐나는 이곳 뉴욕에서 자랐다면 훨씬 많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 정창화(사진) 감독은 자신의 회고전 참석차 이번 주 뉴욕을 방문한 소감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첫 영화가 만들어진지 벌써 60년이 지났을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고 활기찼다.
정 감독은 1960년대부터 수많은 ‘최초’ 수식어를 자신의 영화에 붙여온 ‘전설’과도 같은 존재.
한국인 최초로 홍콩 영화에 진출한 이후 아시아 작품으론 ‘최초’로 유럽 수출을 성공시켰고 이후 1972년작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미국 영화계에 진출해 아시안으로는 처음으로 박스 오피스 1위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신화를 썼다. 당시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말은 정 감독의 해외활동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 감독은 홍콩 활동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메가폰을 잡은지 3년 만이던 1981년 영화에 회의를 느끼고 가족들과 캘리포니아 샌디에고로 이주해 약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 한 편 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정 감독은 은퇴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영화는 즐기면서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군사정권 시절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평생을 몸바쳐온 영화계를 떠나자 후유증으로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자칫 우리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혀질 뻔했던 정 감독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영화계로 돌아왔다. 그 당시까지도 ‘영화를 잊었다’며 굳게 닫혀있던 정 감독의 마음은 임권택 감독 등 제자들이 움직였다. 이후 정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꼽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2005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분에 올리는 등 영화인으로의 인생 2막을 열고 있다. 현재는 LA 한국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으며 한국 영화의 미국 진출을 돕고 있다.
30년 만에 재회한 한국 영화는 그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정 감독은 “비록 나는 액션 영화를 주로 만들었지만 그 안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으려 노력했다”며 “하지만 요즘 일부 한국 영화들은 스토리보다는 잔인함과 폭력 등에 무게를 두고 있어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영화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정 감독은 가장 아끼는 후배 감독에 대한 질문에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구 하나를 찍을 수 없다”며 답을 피했고 확인차 물은 나이에 대해서는 “나이는 잊었습니다. 나이가 밝혀지는 순간 젊은이들과의 교감은 끝나버립니다”고 답했다.
<함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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