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입니다. <신동아>의 전화를 받고 밤새 한잠 못자고 뒤척였던 기억 말입니다. 늘 타인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병원 일을 하는 나의 일상들. 그것을 모아 “죽음 앞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당선이라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쯤일까 확인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지요. 그 땐, 동네의 작은 우체국에서 국제우편으로 원고를 보내며 마음은 성급하게 서울의 가을을 그려 보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의 미국병원 이야기 풀어 내기는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1996년 이었습니다. <생활 수기, 당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말입니다. 이후, 난 나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 놓았습니다. 마치 뽕잎를 잔뜩 먹은 누에가 실을 풀어 집을 만들듯이 말입니다. 바다 동네 산타크루즈에서 시작했던 일은 콜로라도의 깊은 산 동네에 와서도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늘 숨이 가쁘게 돌아가는 중환자실에서의 경험과 33세로 요절한 시인의 딸이라는 자의식은 풀어내야 할 내 평생의 숙제로 내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습니다. 피하지 못할 일이라면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나의 방식이고 열정이며, 오늘을 사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15년 전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에서 받은 상이 아니었더라면 내 평생의 숙제는 시작도 해 보지 못한 채 가슴앓이 만 하다가 끝났을 수도 있었겠지요. 내 글쓰기는 일종의 내 독특한 방식의 자기 정화입니다. 매일 만나는 쉽지 않은 일상 속에서 너무도 다르며 또 너무도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일을 풀어 내는 작업이지요.
8년 전, 바닷가 마을을 떠나 산을 찾아 오며 낯가림이 심했었습니다. 어쩌면 오랜 움츠림이 있지않을까 두렵기도 했지요. 그러나 무엇에든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자신이 있었고 지금은 병원 중환자실의 케이스 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을 할 땐, 열장이 넘는 의사의 오더지를 받아 들고 어느 것이 환자의 상태에 가장 도움이 될까 판단하며 환자를 살리는 일에 촌각을 다투었지요. 곡예단의 저글링을 하는 청년처럼, 외 발 자전거를 타며 접시를 돌리는 소녀처럼 늘 불안하고 최적의 발란스를 잃을까 봐 노심초사 했었답니다. 내 판단으로 환자의 상태가 좋아 졌다면 다행이지만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듯 늘 바라는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 일을 한발 뒤에서 봅니다. 나보다 훨씬 젊고 판단력이 민첩한 간호사들이 땀을 흘리며 숨가빠하면 얼음 물 한잔을 건네며 심호흡을 하게 하기도 하고, 환자 가족을 만나 환자의 상태를 전해주며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 알려 줍니다. 진정 환자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도 함께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라고 알리는 일도 그리 녹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를 숫자로만 바라 보던 시간은 지나 갔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올 수 있는 최악의 상태와 최선의 결과를 동시에 바라 봅니다. 환자와 가족, 의료 팀 전체를 아우르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르고 살아온 습관이 다른 이들은 각각 죽음 뒤를 바라 보는 시선도 다릅니다. 그 안에서 난 오늘도 또박 또박 걷습니다. 근시와 원시가 동시에 조절되는 안경을 쓰고 염색을 해야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어깨를 폅니다.
내가 사는 산자락, 콜로라도의 가을은 참 곱습니다. 산정부터 노랗게 단풍이 들며 내려 옵니다. 아스펜 추리들은 온몸으로 작은 잎사귀들을 찰랑거리며 황금 빛 치마 자작을 흔듭니다. 가을 군무의 춤사위는 황홀경입니다. 이곳으로 여러분을 초대 합니다.
다시 한국일보로 돌아와 소소한 나의 이야기들을 전하며 두고 온 바닷가의 갯내를 그리워 합니다.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손에 다을듯 다가와 온몸을 따듯하게 만들어 줍니다. 맨발로 걷던 산타크루즈의 바닷가 파도가 지금, 내 가슴 안에서 일렁입니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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