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아주 드물게, 어린 시절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어제 밤이 바로 그런 드문 때였다. 침대에 누워서 잠이 깼는데 느닷없이 입술이 움직이며 어린 시절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뒷동산에 할미 꽃, 꼬부라진 할미 꽃, 싹 날 때에 늙었나, 오호 백발 할미 꽃! 천만가지 꽃 중에, 무슨 꽃이 못 되어, 허리 굽고 등 굽은 할미꽃이 되었나? 아하 하하 우습다. 꼬부라진 할미 꽃, 젊어서도 할미 꽃, 늙어서도 할미 꽃!”
케이블 텔레비전 야광시계는 두 시 삼십오 분을 가리켰고 방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여섯 살이라고 자각하는 내가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 일어서서 할미꽃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장소는 육십 삼년 전 부모를 하직하고 눈물을 삼키며 떠나온 고향땅 평안북도 강계군 성간면 별하동 마을이었다. 할미꽃 노래는 내가 어려서 즐겨 부른 동요 중의 하나였지만 모여 앉은 아이들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으레 가까이 있었어야 할 어머니나 여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낯익은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꿈이었다면 그리운 얼굴들을 찾아라도 보았을 터인데 그때 본 것은 꿈이 아니었다. 단지 반수상태(半睡狀態)에서 잠시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았다.
구십 노인에게 환영이 웬일인가? 심리학자들은 아마도 마음에 누적된 잠재의식이 작동하여 나타난 현상이었으리라고 설명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즐기던 많은 동요 중에서 뜬금없이 할미꽃 노래를 부르게 된 까닭은 어데 있을까? 궁금한 일이다. 해석은 어떻든지 그 환영을 보고난 내 마음속에는 한 가닥의 위안과 흔쾌함이 일어난다. 생각하면 나이 들어 노인들 사이에서 살아오면서 무의식 중에 늙음에 대한 지루함과 짜증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몇 해 동안 구십을 향해가는 아내의 병구완에 하루하루 날을 보내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두운 밤중에 잠시나마 괴로운 현실을 잊고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일이 기쁘기 짝이 없다. 이는 틀림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고달픈 노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었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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