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금년 여름은 유달리 더위가 심한 것 같다. 금주 내내 화씨 100도 내외의 붉은 수은주가 오르내리며 최고 체감온도가 115도라고 기상대가 예보했다.
지금은 삼복중이다. 한국에는 또 꽤나 많은 견공들이 살상의 수난을 당하며 삼계탕 집집마다 장사진을 이룰 게 뻔하다.
난방용 전력은 정신없이 요동하여 계량기에 부하를 걸어서 정전을 일으켜 가뜩이나 짜증나는 찜통더위 속에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더위를 식히려고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자니 에어컨 바람이 인체에 좋지 않다며 선풍기를 틀어놓으니 곧 열을 받아 더운 바람을 끌어온다. 밤에는 열대야 현상에 부대끼며 머리가 띵하고 잠자리가 여간 불편치 않다.
옛날 사람들은 더위를 시키는데 멋과 운치가 있었던 것 같다. 노인들은 밤엔 죽부인(竹夫人)을 끌어안고 시원한 밤을 지새웠고 합죽선(合竹扇)이나 까치선 하나 들고 정자에 올라 장기나 바둑판 앞에 적삼을 헤치고 가슴에 부채바람으로 더위를 몰던 신선 같은 낭만이 있었다. 어쩐지 과학문명이 첨단으로 발전했다는 요즘 세상이 더위를 지내기가 더 힘 든 것 같다.
나도 요즘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에어컨, 선풍기 바람의 알레르기성 질병으로 며칠 고생을 했다. 낮에는 이럭저럭 그런대로 피서해 보는데 밤이 돌아오는 것이 겁났다.
생각 끝에 방구석 깊숙이 처박아 놓고 잊고 있던 합죽선을 찾아냈다. 몇 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시장에서 옷을 샀더니 덤으로 끼워서 준 부채다. 그동안 쓰지 않고 뒀더니 새 것이었다. 아직 장판지에 바르는 특유한 기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부터 크게 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인 아파트 5층에 산다. 수 십 년 잘 자란 떡갈나무가 창 앞을 가리고 있다. 똥구멍에 깜빡깜빡 개똥벌레도 더위를 피해서 더 높이 나는 것 같다. 창문을 열어도 방충망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낮에 땡볕에 잘 익은 후덥지근하고 습기찬 불쾌한 바람이다.
컴퓨터 앞에서 쓰던 글을 대강 써서 입력하고 서둘러 자리에 들었다. 얇은 처네로 배를 덮고 부동으로 누웠다. 열을 줄이기 위해 조명등도 모두 껐다. 움직이면 더위가 기습한다. 합죽선을 펴서 손목만 까딱까딱 게으르게 움직여서 부채질 한다. 창을 통해 비치는 달도 안쓰러운지 눈웃음을 보낸다.
부채는 정묵한 어두운 방 공간에 숨은 듯 보이지 않는 바람을 불러온다. 작은 합죽선 부채가 방 안에 있는 공기를 비상소집하듯이 끌어 모은다. 시원하다. 대가 없이 공으로 텁텁한 밤더위를 물리쳐 준다. 고맙다. 확실히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보단 신선하다.
나는 더위와 부채를 통해서 관심 밖에 있던 것이 이처럼 유익하게 쓰임을 받는 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며 에어컨과 선풍기보다는 작은 부채로 제몫을 다하는 충정한 삶을 생각해 본다.
이경주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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