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수화기를 타고 25년 만에 들려 온 목소리는 여전히 낭랑하고 친숙했다.
나와 여고시절 삼년을 같이한 짝이었다.
손재주 없는 내가 가사시간에 낙제할까봐 졸업 때까지 나를 위해 재봉도 수예품도 대신 만들어 주었던, 내가 결혼 할 땐 파티용 냅킨 30개를 예쁘게 만들어 선물로 주었던 고마운 친구.
내가 미국에 온 후 얼마간은 연락이 되다가 그 남편의 한차례 사업 실패 후 소식이 끊겼었다. 이후 친구 남편이 엘에이 주재원으로 온 후로는 줄곧 나를 찾았다고 했다.
드디어 만나기로 한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수십년 세월에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비껴갔다. 함께 수화물을 찾는데 커다란 박스에 아이스 포장을 하여 손수 만든 김치와 말린 조기 한 꾸러미를 가져왔다. 이게 바로 진심어린 옛 친구의 마음이구나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집에 오는 차속에서 친구가 이마의 상처를 보여주며 성형수술은 내가 책임져야한다고 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얘기를 듣고 난 후 참으로 가슴 가득히 미안해졌다. 내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오던 해에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그 무렵 재미없이 산다는 친구 말에 나도 내 미국생활 역시 그날이 그날이라고 썼다.
친구가 다시 내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남편 흉을 보기 시작했는데, 내 남편 아무개 능력도 없고 얼굴엔 살짝 보조개(마마자국)에, 게다가 동료들은 모두 과장 진급했는데 홀로 만년대리 …….
졸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대 얻어맞았단다. 놀라서 깨보니 앞에 남편이 서 있었다고. 그날도 진급문제로 술 한 잔하고 쓸쓸히 집에 왔는데 와이프가 내게 쓰다가 펼쳐 논 편지를 보고 그만 이성을 잃었던 거다. 친구 남편은 운동권 출신이라 진급에 지장이 많았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친구는 동창들의 조언대로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 후 담벼락에 바짝 붙어 있다가 퇴근한 남편에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 놀란 남편이 자제력을 잃고 마침 앞에 보이던 연탄 집개를 들어 올려서 그것을 뺏다가 그만 이마를 다쳐 몇 바늘 꿰맸다고 한다. 25년 만에 만난 친구는 제일 먼저 슬픈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 조언을 아마 친구가 자기 기분에 맞추어 해석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친구가 공수해온 조기를 굽고 맛있는 김치를 먹으며 나는 지금 여학교 때의 내 짝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짝아. 내가 네 이마의 과히 영광스럽지 않은 그 상처를 고쳐줄께’
(아여모 북가주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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