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소식 표지
4.19혁명 계기로 한인회 조직 필요성 실감
총영사관 앞 시위참가자.유학생들 주축 준비작업
2대 한인회장으로 ‘한인소식’ 제작 등 왕성한 활동
지난 12일로 뉴욕한인회가 창립된지 51주년을 맞았다. 한인회 주최로 기념행사를 가졌지만 해마다 이맘때 느끼는 점은 단체장들이 모여 생일 파티만 할 게 아니라 무슨 뜻있는 행사, 예를 들어 뉴욕한인회의 창립 취지라던가 창립 당시의 공로자들에 대한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학술회의 등 무게 있는 행사를 하나쯤 주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뉴욕한인회가 창립되던 1960년의 6월12일이면 한국에서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지 채 두달이 안된 시점이다. 이때 뉴욕의 한인들이 몇 안되는 인원이었지만 본국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청년들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며 이 뉴욕땅에서 궐기한 때이기도 하다. 당시 총영사관(당시 총영사 남궁염)이 있던 9 E. 80 스트릿 건물 앞에서 유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유엔대표부(당시 대사 임병직)가 세들어 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에서도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한인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때 시위대는 한국의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겟으로 하고 있었지만 유학생들이나 거류민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총영사관의 관료적인 태도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규탄의 현장이었다.
3월부터 본국으로부터 들려오는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채고 본국정부에 사퇴의사를 밝혀왔던 남궁염 총영사는 곧 짐을 싸 롱아일랜드 사택으로 이사해 나갔고 총영사관은 최용진 영사등 3-4명의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위에 참가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 기회에 한인회를 만들자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당시 한인들의 공회당 역할로 유일했던 뉴욕한인교회가 자연 여론수렴의 센터가 되었다. 이때의 주역들은 김형린, 강한모, 김계봉, 홍윤식, 김준성, 윤치창, 이병두, 한영교 등 8명이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한인회 발기대회를 준비하고 추진한 인물이 스티븐슨고교의 생물학 교사로 재직 중이던 강한모였다.
그는 해방후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가운데 미 주류사회에 가장 깊숙히 진출해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34년 유학생으로 오하이오 웨슬리안대, 주립 켄트대를 졸업하고 미 특수부대인 OSS(CIA 전신) 복무, 다시 뉴욕대 석사과정, 미국의 소리 방송국 근무 등 사회경험이 풍부했던 그로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한껏 표출할 수 있는 기회였는지 모른다. 발기회, 준비위원회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기존 원로그룹 외에 5년전 창립된 뉴욕한인유학생회 멤버들의 참여도 실현되었다. 이때 유학생 대표로 참여한 인사들은 김일평 회장을 비롯, 노재봉, 노정현, 이범선, 이종익, 남기영 등이었다. 회칙 초안을 마련하는데에도 이들 유학생 그룹의 힘이 보태졌다. 한인회 창립의 골격이 완성되자 6월 12일 일요일을 기해 뉴욕한인회 창립총회가 뉴욕한인교회에서 열렸다. 참석 인원은 40여명. 사회는 설립준비위원회를 대표한 강한모가 맡았고 김승만의 지휘로 참석자들은 애국가를 불렀다.
발기모임, 준비위원회 등 그간의 진행과정을 김준성이 보고했고 한국학생합창단의 합창에 이어 임시의장에 서상복이, 임시서기에 김준성이 선출되었다. 2시간여에 걸친 한인회 규칙 수정을 끝내고 이날 총회는 채택된 규칙에 따라 임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임원 선거 가운데 먼저 실시된 실행위원 선거에서는 다수득표 순으로 11명의 실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윤치창 19표, 강한모 18, 김일평 17, 김준성 14, 김배세 13, 호기성 13, 김형린 12, 이범선 12, 노재봉 12, 한영교 11, 손재승 10표 순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뽑히는 회장 선거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그간 준비모임 등을 거치면서 남다른 열정을 보인 강한모가 당연히 초대회장에 당선될 것으로 보였던 예상을 깨고 2위로 밀려난 것이었다. 결과는 서상복 8표, 강한모 6표, 김형린 5표로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서상복이 젊은 유학생 층의 지지를 받아 초대회장에 당선된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한인회 창설에 심혈을 기울였던 강한모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냉엄한 것. 미국생활 26년동안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현실이었다.
뉴욕한인회는 그렇게 창설됐고 해방 전부터 뉴욕에 거주해 오던 원로 그룹과 새로 입국한 유학생 그룹이 서로 어울리며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960년 6월12일에 출범해 임기 1년을 채워야 했던 초대한인회는 서상복 회장과 대한중석 간의 문제가 발단이 되어 6개월만에 서회장이 사퇴하는 입장이 되었다. 61년 1월7일을 기해 서상복 회장이 중도 사퇴하자 실행위원회는 2대 회장에 강한모를 선출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뉴욕한인회를 구성해 리더십을 발휘해 보려던 강한모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2대 회장으로서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모국소식에 굶주린 한인들에게 뉴스를 전해주는 ‘한인소식’을 제작 배포한 것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멀고먼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소식을 전달하고 뉴욕 동포들의 근황을 알리는 신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한글 타자로 찍은 한인 소식은 1962년 5월16일에 창간되어 그가 재선된 임기까지 총 7호를 발행했다. 1회에 500부를 찍어 동포가정에 우송했다.
임기 중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행을 맞아 총영사관 주최로 맨하탄 인터내셔널 하우스에서 환영행사가 열렸고 강회장은 한국정부 초청으로 모국을 방문한 일도 있었다. 함경남도 홍원 출생인 강회장은 그보다 앞서 뉴욕에서 활약한 작가 강용흘의 친척으로 도움을 받았으며 교편을 잡을 때 사귄 프랑스계 콘스텐스 나시양과 결혼했다.고향을 잃은 실향민으로서 그는 특히 자신이 국제결혼한 사실에 대해 항상 떳떳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공식행사에도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일이 없었고 1985년 필자가 롱아일랜드 서폭카
운티의 리지 자택을 방문했을 때에도 집에 들이지 않고 차속에서 2시간동안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이때 그가 자녀를 두지 않은데 대한 이유를 필자에게 밝힌 적이 있었다. 친척인 강용흘의 집에 자주 들렸을 때 그 역시 국제결혼을 한 강용흘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의 장남이 “아버지 왜 나를 낳으셨나요” 라며 철없이 던진 한마디가 몹시 마음에 걸렸다는 것. 1987년 11월23일 서폭카운티 재향군인회장으로 엄수된 그의 장례식에서 의장병이 그의 관을 덮었던 성조기를 절도 있게 접어 부인 큰스탠스 여사에게 전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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