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육신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된 경우를 가리켜 가사상태라고 한다. 한때 나는 그런 상황 속에 놓였을 때가 있었다. 해서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닌 것을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사물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신과 육체로 이뤄져 있는 것을 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별개로 생각하다는 것이다. 가사상태에 놓였을 때도 난 분명히 주민등록상에 존재해 있었다. 데카르트 생각으로 보면 가사상태에 놓였을 때, 나 김 부 순이는 죽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평온함(?) 상태가 벗겨져서, 지금은 확실히 살아 있다.
자기 변호를 하려는 생각이 강해져서 그런가, 나는 육신보다 정신을 우선에 두고 있다. 정신이 건강하면, 뭔가에 도전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니까 말이다. 요즈음 들어 내가 선호하는 한문숙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어떤 사람이 칼에 손이 베였다. 아플 것이다. 헌데 나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로 아픈가 알 수가 없다. 알아보기 위해서 칼로 내 살을 베어본다? CRAZY!
내 자신도 그 당시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으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고는 절대로 데카르트의 생각을 좇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사상태에 있었던 나는 육신에 생명이 있었음으로 해서 산 자들과 한 가지로 할 수 있었고, 현재 내 몸이 다른 이와 같은 활동을 안 보인다 해도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현재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련가. 그런데 나는 모두와 같이 확실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다 보니 이런 증명을 뭣 하러, 왜 하는 것인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부족함을 많이 지닌 사람일수록 외양에 신경을 쓴다고 한다.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한 존재 증명이 될 뿐인데 말이다. 그걸 분명히 나는 안다. 그런데도 나는 외양에 마음을 쓴다. 일단은 단정하게 보이려는 생각에서 말이다. 늘 이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내가 나에게 물어 본다. 그런 것이 진정한 내 마음이냐고?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말한다. 너는 사람이기 이전에 여자거든.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럴 걸….
어떻든 간에 우리 모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애쓰며 지내는 듯하다.
김부순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