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앉는 자리. 오늘도 그 자리가 비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장석주 시인의 몽해항로를 읽다 잠시 기지개를 피기 위해 문 밖으로 나갔다. 찻집 밖에 서 있는 포플러 나무 등걸마다 새겨진 바람 소리를 들었다. 봄에는 수 많은 꽃들이 제 마다의 자태를 뽐내었지만 여름은 겨우 목백일홍과 유도화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이면 하양, 보라, 자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즐겁게 하였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 겨울이다.
찻집에는 책 읽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다. 그 속에서 친구와 함께 장석주 시인의 시집 몽해항로를 다시 읽는다.
기형도 시인이 사랑한 장석주 시인의 열 네 번 째 시집으로이 책은 얇고 길고 하얗다.
갑자기 시집 표지에 그려진 자주색 두 도형이 내 눈길을 사로 잡았다. 하나는 굵은 선의 네모이고 그 위에 속이 꽉 채워진 작은 원이 떠 있다. 친구는 그 책의 표지에 있는 원을 보더니 “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하고 뜬금 없이 내게 물어보았다.
“네모 안에서부터 튀쳐 나온 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네모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고”? 친구는 되 물었지만 “아니야” 하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 속이 잉잉거렸다. 그 네모와 원이 어쩌면 이 시집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시 1>이 먼저 나를 사로잡았다.
<중략>낙타를 만나거든 낙타가 되고/모래바람 이는 사막이 되라
순례자를 만나거든 옛길이 되고/오래된 성전이 되라<중략>
강을 만나거든 바람으로 건너고/산을 만나거든 묵은 소나무 곁 바위로 살라
고아를 만나면 푼돈을 쥐여 주지 말고/그의 작은 주먹이라도 되라
거지를 만나면 불우를 연민하지 말고/그의 옷 솔기에 붙은 이라도 되라
부처를 만나면 보리수가 되고/보리수 아래 푸른 그늘이 되어 누워라
나한을 만나거든 나한이 되고/나한이 싫으면 주린 뱀이 되라
개구리를 만나거든 뱀으로 살지 말고/차라리 개똥이 뒹구는 풀밭이 되라.
혹한이거든 얼음으로 꽁꽁 얼어 붙어 있다가/얼음이 풀리면 시냇물로 흘러라
죽음을 만나거든 꽃으로 피어나지 말고/여문 씨앗으로 견뎌라
<시 1>을 읽으면서 괜히 몸이 추워졌다. 즉 초월을 하라는 이야기인데 초월이 말처럼, 시인의 시처럼 쉬운 것이냐 말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그 대상이 지닌 속성을 초월하여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라는 뜻일 것이다.
지난 가을에는 단풍을 보러 요세미티를 넘어가 비숍(Bishop, California)으로 7시간 운전하여 명경 호수와, 눈 덮힌 산과, 차르르르 떨고 있는 노랑 사시나무(Aspen Tree)의 겨울로 가는 장례식을 보고 왔다. 가는 길 내내 도로 옆에 “ 노랑풀섶(Yellow Rabbit bush)”들이 가을을 보내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뒤로 토끼가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가을의 끝, 겨울의 입구에서부터 어느 새 나는 노랑풀섶 너머 발갛게 물들어 오는 저녁 노을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상을 초월하여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만나 그로부터 무엇인가 할 말을 진득하게 전해받고 싶음이었다 “순례자를 만나거든 옛길이 되고 오래된 성전이 되라”고 시인이 말하듯이 이 <시 1>을 읽으면서 그 대상을 뛰어넘는 초월의 이미지가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초월에는 머무름이 없다. 머물러 있는 삶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의미들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삶은 바다요 강이다. 머무름 없이 끝없이 흐르고 굽이쳐야 하는 연속상의 곳에서 깊게 들여다 봄을 말할 것이다. 깊게 들여다 보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초월의 자아가 생겨난다. 그 자아는 여문 씨앗이 되어 다음의 시간을 기약한다. 때로는 버리고 비우는 것이 역설적으로 초월이 되기도 한다. 내가 오늘 무엇을 만나든 나는 그 속에 들어 앉은 초월의 이미지를 볼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의 끝은 초월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시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시를 만나면 시인으로 살지 말고 저문 들판의 한 줄기 바람으로 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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