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할머니의 말을 믿고 어린 시절, 졸린 눈을 비비며 밤을 샌 기억이 있다. 자다 졸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TV 속에서는 “10, 9, 8, 7, …3, 2, 1 !!” 그리고 보신각 타종이 시작되었다.
열흘 뒤면 우리는 2008년을 뒤로 하고 2009년 새해를 맞게 된다. 일이든 가정이든, 이제 어느 조직에서든 무언가를 책임질 나이가 되고 보니,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이 책임감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두렵기도 하다.
새롭다는 건 큰 변화로 두렵기도 하지만 설렘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새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새 차를 사던 날도 그랬다. 설레는 마음에 반짝이는 차를 닦고 또 닦기를 몇 번, 차 앞에서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트렁크 정리도 잘하겠다고, 그리고 긁히는 일 없이 조심조심 운전하겠다고. 처음 며칠은 집 앞에 잘 세워둔 차를 밤사이 누가 훔쳐가지나 않을까 초조했던 적도 있었다. 새것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우리 인생을 살맛나게 만드는 기쁨이기도 하다.
2008년 한해에도 정말 많은 ‘새 사람’들은 만났다. 새 교인, 새 친구, 새 학생들…. 교회에서는 지휘자로서 새 성가대원들을 만나고, 학교나 개인 스튜디오에서는 선생으로 학생들을 만났다. 어떻게 보면 그때마다 나는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당당해 보이기 위해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을 열심히 전달하기에 바빴다. 우연한 자리에서 친구가 그런 내 습관을 지적해주며 그것이 ‘선생님 기질’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나 역시 자기 말만 많이 하는 사람 앞에서는 표현하진 않았지만 반감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화하게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곤 했다.
그것은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가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피아노 레슨 도중 음악적 지식과 악기 다루는 테크닉만 일방적으로 가르쳤을 때와 잠깐이라도 틈을 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을 때, 레슨 후 스튜디오를 나가는 학생들의 표정이 다르다.
한 심리학자는 “말을 많이 하고 난 사람은 자신의 말을 들어준 상대에게 왠지 모를 마음의 빚을 갖게 된다”고 했다.
사실이 그렇다. 남의 이야기를 정성껏 오래 경청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내심과 배려, 관심과 시간의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다른 이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말만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욕심, 자기 합리화와 변명, 그리고 자기 자랑을 위해 대화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자녀나 친구, 직장 동료, 부부간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좋은 충고, 사랑의 조언을 한다면서 상대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은 ‘교과서적 충고’를 하곤 하는가. 그들이 조언을 구할 땐 이성적이고 냉철한 논리적 충고 보다는 따뜻한 경청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2009년에는 조금 더 프로다운 모습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상대를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는 ‘사랑의 경청’을 통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겸손한 마음을 전하려 노력해야겠다.
앤드루 박
피아니스트·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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