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사수로 모셨던 상사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같이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분이라 그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섭섭해 하는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직장 동료들은 물론 같이 일했던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한결 같이 아쉬워하며 가기 전에 얼굴이나 보자고 앞 다투어 연락을 해왔다. 이해득실을 따져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 바닥에서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마도 상대를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려는 그의 성격 때문에 어디서나 계속 연락하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같은 팀에서도 그가 보여주었던 배려는 남달랐다. 자신의 지휘 하에 수행되었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발표하는 자리가 되면 꼭 같이 일했던 부하 직원에게 공을 돌려 일할 맛나게 했으며(물론 일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시간 단위로 일의 경과를 체크하는 치밀함도 갖추었다) 야근을 해야 할 때는 사비를 털어 저녁 식사를 직접 사다 날랐다.
마케팅이라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부서에 있다 보면 꼭 한 달에 한 두 번 씩 저녁모임이 있게 마련인데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내 처지를 고려해 꼭 가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미리 언질을 주고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배려했다.
사업상 갑과 을이 확실한 관계의 만남에서도 늘 을의 입장에 있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솔직하게,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상대방의 잘못 때문에 일이 꼬여 힘들게 되는 순간에도, 잘못된 사항을 지적해야 하는 불편한 순간에도, 전혀 개인적인 감정을 싣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이야기해서 듣는 사람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기술이 있었다. 리더가 되면서 매사에 지시조나 명령조가 많아지고 상대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주장이 앞서는 사람들을 종종 보다가 이 상사와 같이 일하게 되면서 시너지 효과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미지 컨설팅의 전문가인 이종선씨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힘을 ‘따뜻한 카리스마’라고 불렀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결국 나를 이끌어주고, 믿고 따를 만한 믿음이 느껴지게 하는 일종의 이끌림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답을 제대로 제시해 줄 것 같은 신뢰와 공감을 통하여 그러한 믿음은 하나 둘 쌓여갈 수 있고 그렇게 쌓인 신뢰는 목숨을 걸만한 최대의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상대를 존중하는 데서 관계는 시작된다. 자리와 재력으로 얼마간은 사람들을 붙잡아둘 수는 있지만 그 끝이 오래 가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배려를 하기 위해선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어 자신을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니 자신을 낮추는데 이어 상대방을 마음으로 존중하고 그것을 성숙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신뢰하는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당장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 감사와 칭찬의 말을 먼저 하는 것, 부탁과 양해의 표현을 분명히 하는 것 등이 배려의 시작이 아닐까.
그의 귀국 전 마지막으로 송별파티를 했던 날 실로 오랜만에 LA에 비가 왔다. 집에 와서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선명하지가 않았다. 방이 너무 환한가 싶어서 불을 꺼보았는데 순간 놀랐다.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서였다. 내 안의 불을 끄니 상대가 잘 보였다.
지니 조 힐리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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