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노당에 강기갑이라는 국회의원이 있다. 경남 사천 출신으로 늘 긴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나오는 특이한 인물이다. 농고 출신으로 젖소를 기르던 그는 농민의 아들을 자처하며 철저하게 농부들의 권익을 옹호해왔다. 국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과시키려 하면 1인 시위로 저지하고 미국산 쇠고기 파문이 일면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걸어갈 정도로 확신에 찬 행동하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지난 번 총선에서 당선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출마한 사천은 한나라당의 실세 사무총장이던 이방호의 텃밭으로 여론 조사에서 큰 폭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선거가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박근혜 지지자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박사모 회원들이 공천 주역인 이방호 낙선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민노당과는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박사모의 활약에 힘입어 강기갑은 182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당선됐다.
이와 비슷한 일이 지금 미국에서도 일어나려 하고 있다. 지난 주말 워싱턴에서 열린 민주당 당규 위원회는 당 규정을 어기고 예선을 일찍 시작한 플로리다와 미시건의 대의원 수를 절반만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힐러리 클린턴이 대의원 수에서 버락 오바마를 따 라잡는 것은 산술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이쯤 되면 깨끗이 승복하고 차기를 노리는 게 누가 봐도 순리다. 그러나 힐러리를 비롯 힐러리 지지자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힐러리 자신이 이번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과 8월 덴버에서 열리는 전당대회까지 싸움을 계속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일부 힐러리 지지자들은 한 걸음 더 나가 본선에서 오바마를 찍기보다는 차라리 존 매케인을 찍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힐러리와 매케인은 국방, 외교, 의료, 세금, 복지 등 모든 정책 부분에서 정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민주당 안에 패인 골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다.
민주당의 내분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신나는 것은 매케인이다. 정말 힐러리 지지자들이 대거 매케인을 찍는다면 오바마가 떨어질 수도 있다. 민주당의 내분에 염증이 난 중도파가 매케인을 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결과는 민주당 우드로 윌슨의 승리였다. 공화당 현직 대통령의 실정에 실망한 테디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당내 경선에서 패하자 당을 뛰쳐나와 ‘숫사슴당’(Bull Moose Party)을 만들었고 지지표가 갈라지면서 남북 전쟁 패배 후 맥을 못 쓰던 남부인이 60년만에 집권한 것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한번 감정이 상하면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타당한 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연초까지 민주당 경선에서의 승리는 당연히 자기 것으로 생각했던 힐러리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한번 뽑아보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백인 여성 등 힐러리 지지자들의 실망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공정한 경선을 거쳐 결과가 나왔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이는 민주주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억울하기로 따지면 정말 유효 표에서 이기고 선거인단 수에서 져 대통령 자리를 놓친 앨 고어를 따라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도 연방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깨끗이 승복하는 아름다움을 보였다. 그 후 그는 노벨 평화상도 타고 존경받는 당의 원로로 남아 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올 대선에서 오바마가 패배하면 4년 뒤도 있고 오바마가 이기더라도 8년 뒤도 있다. 힐러리는 이쯤에서 이성을 되찾고 뭐가 진정으로 자신과 민주당을 위하는 길인지 잘 살펴보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