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영국은 한 때 농업 국가였다. 산업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19세기 중반까지 “농업은 영국의 기간산업”이며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며 “농업 시장을 개방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영국의 농부와 지주들은 고관세로 외국 곡물이 들어오는 것을 굳건히 막고 있는 ‘곡물법’(Corn Law)의 보호 아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이 법의 최대 피해자는 중노동과 저임에 시달리고 있던 노동자들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싼 보리를 수입해 빵을 만들면 훨씬 싸게 배를 채울 수 있는데도 이 법에 묶여 월급의 대부분을 식비로 써야 했다.
물론 당시에도 영국이 나아갈 길은 농업이 아니라 공업이며 농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리처드 콥든이다. 원래 무역상 출신이던 그는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장사만 계속했으면 거부가 됐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보통 상인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틈만 나면 책읽기를 좋아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독서와 사색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영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곡물법’의 폐지가 선결 과제라는 점이었다. 그는 1839년 맨체스터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반 곡물법 동맹’을 만들었다. 당시 보수당 총리이던 로버트 필은 폐지의 필요성을 깨달았지만 농부와 지주들의 지지를 받던 집권 보수당 내에서는 이 법 폐지에 대한 극심한 반대가 일었다. ‘곡물법’ 폐지 운동가들은 ‘매국노’로 매도됐다.
그럼에도 ‘곡물법’은 보수당 일부와 야당이던 휘그당의 도움으로 결국 1846년 제정 31년 만에 폐지되고 만다. 그러나 이 일로 보수당은 결국 둘로 쪼개지고 필도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 때 갈라진 보수당 일파와 휘그당, 급진파 등이 모여 만든 당이 그 후 80년간 보수당과 자웅을 결한 자유당이다.
‘곡물법’ 폐지는 영국이 보호 무역주의의 족쇄를 깨고 무역 자유화로 가는 전기를 만들었다. 영국의 공산품이 전 세계를 휩쓸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가능해진 것도 상당 부분 그 덕이다. 권위 있는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도 ‘곡물법’ 폐지 운동의 하나로 그 때 만들어졌다.
공교롭게 콥든 사망 142 주기인 4월 2일 한미 간에 역사적인 자유무역 협정(FTA)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 협정 체결을 놓고 160년 전 영국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 집권당과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게거품을 물고 펄펄 뛰며 이 협정 체결을 반대하는가 하면 이 협정 추진자들은 ‘매국노’로 몰아 부치고 있다. 시간과 장소가 바뀌어도 역사의 발전 과정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인간은 대체로 경쟁을 싫어한다. 몸을 일으켜 바삐 돌아다니고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보다는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천성적으로 게으른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발전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채찍이다. 자유 무역은 경쟁을 통해 기업의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뿐 아니라 관세를 낮춰 소비자로 하여금 좋은 제품을 싸게 사게 하며 교역량을 늘려 경제 규모를 키우고 일자리를 창출한다.
그러나 이런 실질적인 이유보다 자유 무역이 중요한 것은 모든 자유는 서로 연결돼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제한은 잠재적으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유럽 역사는 ‘시장의 자유’가 ‘시민의 자유’보다 앞서 이뤄졌으며 경제적 자유는 결국 정치적 자유를 불러왔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한미 FTA 반대자들이 하루속히 ‘경제 자유를 짓밟는 것이 발전’이고 ‘쇄국이 구국’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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