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코스타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교회가 좋은 것은 그것의 공동체적 속성 때문이다. 교회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며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다. 공동체적 특성을 뜻한다.그러기에 무교회주의자는 그 명분이 제 아무리 탁월하게 보여도 적어도 성경 논리상으로는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목사인 나에게도 한 때 그런 때가 있었다. 왠진 모르지만 태생적으로 반골이자 야당적 기질의 소유자였던 나에게 교회의 그 무모한 집단성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내내 나의 냉소적 먹잇감이 되어왔었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몸담고 있는 그 공동체는 내가 풀어내야 할 영원한 숙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럴때 적절하게쓰이는‘운명적’이라는 표현을 아는가? 나의 냉소와는 상관없이 꾸준히 그 교회의 주인이셨던 예수는 결국 그런 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교회의 일꾼인 목사로 만든 것이다. 그건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얼마 전 스테디셀러 영성 작가인 필립 얀시에게서 그 유사성을 찾아냈다. 그의 자전적 교회론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다. 원제는 “Church: Why Bother?”다. 약간은 시니컬하게 느껴지는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에게 교회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그는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 도시의 한 보수적인 교회의 교인으로 자랐다. 문제를 전혀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문제되는 문젯거리를 자기들의 논리로 무장하기 위해 성경 속의 지지구절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솔직했던 얀시를 무척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질기게 따라붙는 운명성! 역시 교회는 그의 평생에 풀어야 할 골칫거리가 아닌, 다시 규명해야 될 운명적인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정도의 심오성은 없지만, 나는 나의 교회 인생 여정 안에도 그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 결국 내가 이 책에서 느낀 건 이 점이었다.
문제투성이니까 교회는 떠나야 되는 곳이 아니라, 문제투성이기에 교회는 더 사랑해야 한다는 점. 기괴한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설은 무릎을치게 하는 ‘결정적 특성’을 담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더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의 생애와 사역 속에서 이미 보여주신 바다. 한때 내 딸이 ‘리걸리 블론드’라는 영화를 좋아했었다. 그때 딸이 했던 말,“아빠 나 하바드 갈래요?(그 영화의 배경이 하바드 대학이었음)” 무슨 이유에서든 자식이 하바드 가겠다 그러면 싫어할 부모는 없다.
“왜?”(감격한 표정으로). 그러나 딸의 대답은 기상천외의 것이었다. “보니까 하바드 대학은 날마다 파티만 하던데!” 당시 숙제에 매달려 인생이 지루했던 내 딸은 영화속의 하바드를 숙제 없는 대학으로 점찍었던 것 같다. 어떤가? 숙제 없는 대학이 대학인가? 교회에 한번 적용해본다. 숙제 없는 교회 역시 교회가 아닐 것이다. 숙제가 남아 있어 교회는 여전히 우리의 존중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숙제 없는 교회를 찾고 있는가? 있을 리도 만무하겠지만, 혹시 있다면 가지 말라. 당신이 거기에 도착하는 즉시, 없던 숙제가 그 교회에 생기고 말 것이니까. 숙제 있는 교회는 당신의 운명이다. 그냥 감사하고 열심히 다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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