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음악을 동경하는 것은 그 속에 버려진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인은 새벽 눈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계에 바쁘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충혈된 눈초리로 휘청거려야 한다. 그러기에 삶의 진실은 늘 허우적거림 속에 가려져 있기 마련이다. 진실이란 빵의 법칙 앞에 변형된 희망이다. 그러기에 현실 속에서의 진실이란 언제나 고통스럽고, 상처가 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사랑의 진실이든, 혹은 양심의 진실이든…, 슬프고도 허약하며 고독하면서도 절망적이 되어버렸다.
특정 음악은 간혹 우리가 버린 세계, 황폐한 진흙속의 한송이 연꽃처럼 포근한 진실을 전해주곤한다. 마치 벌에 쏘이고 상채기 난 의식 속에 한줄기 희망이라고나할까… 절망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때… 한조각 한조각, 희망을 조각하듯 포근한 속삭임으로 전해주는 음악이 있다. 마치 이룰수 없었던 사랑…, 그러나 음악으로 이룰 수 있었던 사랑의 진실… 브람스의 음악이 그런 것이라고나할까.
브람스의 재능을 가장 질타한 사람은 차이코프스키였다. 선율미없는 음악이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형식에서 우러나오는 기품과 절제의 조화를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따따따 따’ 평범한 네마디(음표)로 위대한 교향곡(운명)을 만들어낸 베토벤을 보라. 브람스에게서 선율이란 오히려 그의 예술에 방해였을 뿐이었다.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이란 단순한 질료(선율)로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내면의 힘이라는 철학(?)을 믿었던 듯 싶다.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샤강)’로도 유명한 브람스의 음악은 정조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품위가 있다는 말인데, 화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수수하면서도 싱싱하다. 마치 문학소녀같은 따스함이 느껴진다고나할까. 내면적이고도 늘 꿈꾸는 소녀같다. 과장 없고 화장기가 없기에 가끔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개성이 없다는 등의 비난이 그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마치 남자속의 여자라고나할까, 브람스의 음악속에서는 박력은 별로 찾아 수 가 없다. 남성미도 없고 그렇다고 여성적인 간들어진 맛(선율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소 투박하고 내면적인 선율의 브람스의 음악은 어딘가 중성적인 억제된 감성이 느껴진다. 진한 사랑의 표현보다는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고나할까. ‘브람스를 듣는 아침…’,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 따위의 클래식한 어휘들이 말해 주듯 브람스의 음악은 말그대로 클래식한 이미지를 대변해주는 음악이었다. 신고전주의 브람스는 결코 음악에 어울리는 않은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았다. 연극(오페라)등과 결탁하지도 않았고 거창하고 대규모 악기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브람스가 순음악의 계보 바하, 베토벤을 이어받아 독일의 3 B로 불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브람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신고전주의다. 베토벤을 좋아한 나머지 베토벤을 닮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실제로 그의 교향곡 1번은 베토벤의 10번이라고 불릴만큼 베토벤적인 모든 것을 주입시켜 만든 역작이었다. 브람스는 그의 4편의 교향곡이 말해주듯 결코 교향곡분야에서 베토벤을 능가할만큼 큰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번 만큼은 베토벤 못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려 20여년간 구상하여 탄생시킨 교향곡 1번은 사실 브람스를 집대성해 놓은, 대명사나 다름없는 작품이었다. 그의 나머지 2,3,4 번교향곡은 1번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특히 1번 4악장에 등장하는 혼의 넉넉한 소리… ‘알프스의 뿔피리’는 ‘운명’의 첫 소절이 베토벤을 상기시키는 것 못지않게 브람스를 상기시켜주는 음악이다. 운명이 자신으로 향하는 몰입이었다면, 뿔피리 소리는 승화의 넉넉함이었다. ‘따따따 따’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온갖 오류와 고뇌의 환상에서 해방시켜주는 음악…. 누구나 간직한 외로움, 목동의 서정, 서민적 안식을 머금은 그저 바람같은 음악이라고나할까.
브람스를 듣는 아침은 기분이 좋다. 마치 코스모스가 핀 가을녘, 이웃 담장 너머 2층집 소녀가 창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같다고나할까. 청초하며, 차마 넘지 못할 선을 넘지 않으려는 듯 지극히 억제된 브람스의 음악은 마치 수줍은 소녀의 첫 사랑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투박한 선율이 겉으론 토라져 보여도 사실은 너무도 깨지기 쉬운…, 상처 뿐인 여린 감성으로 다가온다.
음악은 음으로 말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라 뭉개구름처럼 모호한 언어이다. 음악은 감성으로 뭉쳐 있기에 체계가 없다. 사실 음악에서 체계(이야기)가 따로 필요없다. 그저 먼 추억, 내면의 응축된 슬픔, 격정이나 감격 등을 표현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음악이 가끔 편지처럼 들려올 때가 있다. 바로 브람스의 음악이 그런 것일 것이다. 이심전심.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음악, 마치 한 통의 편지 처럼 다정다감한 음악… 클라라와의 못다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낸 브람스는 우정을 신탁받았을까. 그의 2악장들은(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1번) 마치 밤새워 썼다가 지워버린 편지… 그 눈물자국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더욱이 이루지못할 사랑일경우…. 당신이 오늘 고독하다면… 브람스의 음악을 들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추억의 그림자 처럼 마음 속에 온갖 순수했던 순간이 하나의 비가 되어 흐르고 있다면, 브람스의 음악속에 소녀의 초상을 띄워 보시라…
<이정훈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