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는 교과목 중에 공민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민’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나라에 딸리어 독립생활을 하는 자유인’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나와 있는 ‘공민교육’에는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교양을 베풂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라 되어 있다.
나는 이 시간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을 배웠고 이 원칙은 나에게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교양’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이 원칙이 현실과 마찰을 빚는 것을 목도한 적이 없고 그러한 가능성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사회의 날로 치열해 가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대립을 보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아마도 수정헌법 제1조 “의회는 국교를 제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금하는 어떠한 법도 제정할 수 없다…”를 주도한 제임스 매디슨 조차도 200년 후 미국사회에 이러한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인가.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미국 생활이 아직 서툴던 80년대 후반, 내게 조그만 쇼크를 준 사건이 있었다. 세 살짜리 딸을 데이케어에 보낸 지 얼마 안되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다. 나는 당연히 그 놀이방에서 시즌과 관계된 특별활동이 있을 줄 알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예쁘게 장식한다든지,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든지, 하다 못해 아이가 징글벨 노래라도 배워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주간은 평소보다 더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보니 한국에서 늘 들었던 “메리 크리스마스”란 인사도 듣기 힘들었다. 미국인들의 인사는 주로 “해피 할러데이”였는데 같은 달에 들어 있는 하누카와 크완자(아프리카 민속명절)에까지 무난히 써먹을 수 있는 인사말이었다.
그 후 나는 동네에 세워진 연말연시 장식물들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근무하는 에반스톤시에서는 해마다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광장에 세우는데, 나는 이것도 정경분리 원칙을 위반한다 하여(납세자들의 혈세로 특정 종교를 부추기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누가 소송이라도 걸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또한 얼마전에는 인근에 있는 사립학교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평소 조그만 기독교 계통 학교로만 알아왔던 나는 웹사이트를 통해 그 학교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고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공교육에 맹렬한 반기를 들었으며, 그 결과 주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학교측 주장으로는 거부한) 학교임을 알았다.
지난 31일 부시 대통령은 자진사퇴 형식으로 낙마한 해리엇 마이어스 대법관 지명자를 대신해 사무엘 A. 앨리토 연방 순회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분석가들은 입지가 약화된 부시 대통령이 공화당 내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온건 보수보다는 보수 색깔이 확실한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의회 인준과정을 통해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 주요 이슈에 대한 그의 견해가 검증될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 같지만 이 과정은 결국 그가 보수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녔느냐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지녔느냐를 알아보는 검증 절차가 될 것이다.
200여년 전 계몽주의 세례를 받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헌법으로 명문화했지만 모든 공적인 것에서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한수민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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