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것과 채우는 것
김 숭 목사/ 콘트라코스타한인장로교회
오늘 저녁도 역시 후회다. 돼지도 자기 용량의 60퍼센트밖에 안 먹는다는데 난돼지보다 더 못한가? 낮에 느글느글한 미국 샌드위치를 먹은 탓인지 저녁 밥상에 등장한 토종음식이 내 입맛을 확 당겼다. 당기는 입맛에 가장 힘든 건 역시 절제! 60퍼센트가 뭔가? 100%, 아니 적어도 140%의 포만감이다.
사람은 뭐든지 채우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문화적 존재여서그런가? 경작하고 개발하고 창조해내는 영적 존재여서 그럴까? 짐승들은 배만 채우면 먹이가 눈앞에서 서성거려도 꿈쩍도 않는다던데 … 인간은 뭐가 그리 부족해서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을까? 먹는 채움은 기본이고, 자신의 내외에서 종류도 세기 힘든 욕망의 허기를 끝없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비우는’ 일이다. 바깥을 비우려면
내 ‘안’부터 먼저 비워야 한다. 그러나 안을 비우는 것이 더 힘들다. 사실 안이잘 안 비워지니까 바깥도 안 비워지는 것 같다. 왜 잘 안 비워질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내 안에 내 스스로도 조절하기 힘든 ‘다른 나’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또 다른 ‘나’(other self)가 있다. 그 ‘나’는 꺜 나’(real self)에게 뭔가를 계속 채우도록 자극한다. 얼마나 무서운 ‘나’인가?
그런데 언젠가 나를 향한 온전한 비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항상 그러면 참 좋으련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그건 다른 말로 ‘포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자아에 대한 포기, 내 안의 다른 나가 없어져버린 듯한 확실한 느낌, 그래서 어느덧 찾아온 새로운 희열 같은 것, 그때 그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시적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내 안에서는 채움의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본다. 어차피 다 비우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 비움의 작업과 동행해야 할 채움 역시 신경 써서 잘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비우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별 신경을 못 썼던 것 같다.
미국적 미는 적절한 여백미다. 한국 방문 시 어떤 집에 가보니까 잘꾸며놓았다고는 하는데 너무 많은 것들로(다 고가품으로) 가득 채워놓았다. 그 사람은 가득 채우는 것이 멋이요 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았더니 한국 거리는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읽기도 힘든 간판의 행렬, 산 한 복판에 우뚝 선 아파트들, 거리마다 자동차는 가득, 옛 산수화의 여백미는 그저 흘러간 전통의 일부일까? 일단 그걸 본 나는 호흡부터 가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미국에 돌아와 보니 여백이 많아서 참 좋았다. 호흡도 차분해졌다. 그 후 난 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무엇으로 적절히 채우느냐, 이것 역시 참 중요한 일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이제 그 교훈을 ‘나’라는 존재에게 잘 적용시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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