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엄마가 성적표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일주일째 가방 속 깊숙이 처박아 둔 성적표….
엄마가 미용실 갔다가 나와 같은 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아줌마를 만난 듯했다.
그리고 벌써 오래전에 성적표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또 자식의 성적자랑을 늘어놓는 그 아줌마를 보며 엄마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만은 엄마에게 어떤 험한 말을 듣게 되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등교버스에서 나의 오랜 숙원을 푼 날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넘게 바라만 보던 ‘버스 소녀’에게 편지를 건네준 것이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를 처음 본 순간,내 코는 향기로운 샴푸향에 벌름거렸다.
그날 이후로 줄곧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탔다.
그렇게 내 마음은 샴푸 향기로 가득 채워져 갔다.
원래 계획은 지각을 각오하고 버스 소녀가 내릴 때 함께 내려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편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버스 소녀가 내리려 하자 나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이 아니면 영영 전해줄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가방 속에서 편지를 꺼내 버스 소녀에게 던져주다시피 주고 말았다.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지만 내일 다시 만나면 뭔가 기별이 있겠지?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너 연애 하냐? 이런 것까지 안 보여줘도 되니까 성적표나 줘.”
나는 엄마 손에 들린 분홍색 편지지를 보았다.
분명 내가 밤새 쓴 편지였다.
봉투가 없어 규격봉투에 넣었던 편지.
그럼 내가 버스 소녀에게 건넨 것은 성적표가 든 규격봉투?
난 엄마 팔을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매달려도 필요 없어! 성적표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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