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숭 목사 (콘트라코스타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문학에 셀프 카타르시스(self-katarsis)라는 말이 있다. 대개 자기정화(작용)로 번역된다. 시(詩급)라면 잘 응축된 언어기교에서, 소설이라면 스토리의 절정 부분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급격한 발전이나 최고조 상태를 말한다. 스토리의 절정은 대개 ‘반전’에서 많이 생긴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으로 치닫는다든지, 악역의 득세 도중 그간 당하기만 했던 선한 편이 갑작스런 복수극 연출의 호기를 맞는다든지, 주역처럼 보이지 않았던 존재의 느닷없는 출현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때 독자는 저자와 하나 되어 감정의 엑기스에 충만하게 젖어든다.
문학만 그런 게 아니다. 스포츠도 그 면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르다. 연극의 어원이 ‘놀기’(play)에 있다면 스포츠가 ‘플레이’(놀기)인 것은 더 당연하다. 2002년의 드라마틱한 월드컵이 끝나자 어떤 글에서 스포츠를 이렇게 평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문명의 기원을 역설적으로 얘기하는 이들은 학문을 ‘궁금한 사람들’ 때문에, 과학기술은 ‘게으른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스포츠는 ‘심심한 사람들’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에 따르면 인류역사상 ‘심심한 사람들’이 발명한 최대의 발명품은 축구요, 월드컵은 그 최상의 상품화라고 할 수 있다... ‘손치기 놀음’(배구)이나 ‘막대 때리기 공 놀음’(야구), 그리고 ‘구멍 넣기 공 놀음’(골프)과는 달리, 어떻게 보면 원시적으로 보이는 이 ‘발차기 공 놀음’ 때문에 지구는 4년마다 한 번씩 들썩거린다.” 이처럼 스포츠는 심심한 지구인들이 놀기 위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며, 그러기에 인기 있는 스포츠일수록 거듭되는 반전의 카타르시스에 충실하다.
필자는 ‘발차기 공 놀음’인 축구보다는 ‘막대 때리기 공 놀음’인 야구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필자를 열광케 하는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지난 한 달 동안 있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역전드라마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도 자주 우승했던 팀이 그랬다면 덜했겠으나, 지난 86년간 단 한 차례도 우승을 못한(그들은 일컬어 ‘밤비노의 저주’라 한다) 팀이었기에 그 카타르시스가 더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양키스가 3승할 때만 해도 승리는 당연히 양키스의 것으로 점쳐졌었다. 그러나 넷째, 다섯째로 가면서 역전극은 지속되었고, 에이스 투수 커트실링의 핏빛 투혼을 거쳐 7차전에선 결국 라이벌 양키스를 침몰시켰다. 그들은 이어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마저 4연승하는 기염을 토하며 드디어 86년만의 한을 풀고 말았다.
필자에게는 좀 이상한 근성이 있다. 강한 팀을 향한 이유 없는 미움이다. 그래서 야구는 양키스, 풋볼은 달라스 카우보이가 싫었다(양키스 카우보이 팬들에겐 죄송!). 특히 양키스는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싫었다. 1번부터 9번까지 어느 하나 쉬운 상대가 없는 최강의 팀이다. 다른 팀에 있으면 각 선수가 다 4번 타자감이다. 그래서 그 팀이 우승 못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다. 그래서 양키스와 결승에서 맞붙었던 2001년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3년의 플로리다 말린스, 그리고 금년의 보스턴 레드삭스를 힘껏 응원했던 것이다.
필자는 목사이기에 설교할 기회가 많다. 이번 보스턴의 우승은 설교의 예화로 쓰기에 적절한 요소들이 풍성하다. 앞으로 하나씩 사용해볼 예정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것은 역시 그들의 극적인 역전(반전)이다. 3연패 뒤의 7연승. 포기해도 당연한 상황을, 어떤 순간을 발판 삼아 상대가 제어하기 힘들 기세로 밀어붙이는 그 모습이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신앙도 반전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게임을 한다면 인간에게 그 게임은 당연히 져야 되는 게임이다.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런 인간을 살리는 극적 반전의 발판이 된다. 거기에서 신이 죽으면 안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이 거기서 죽었다. 종결된 줄 알았다. 그러나 종결이 안 되었다. 그게 반전을 불러 일으켰다. 죽었는데 산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그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며 곧바로 회복의 길로 들어선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구원이다. 아 그렇다! 신앙은 반전으로 시작되어 반전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또 그 ‘시작’과 ‘종결’ 사이마저도 또 다른 형태의 반전의 스펙트럼이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필자를 녹였다. 내 안에 신앙적 ‘자기정화작용’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이 되었다 지금은 목사까지 되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반전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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