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난에서 ‘시시한 글’이란 글을 읽고 공감한 바가 많았다.
사실 이 몇 년 사이에 신문을 펼치면 무슨 무슨 문인회라는 간판을 달고 글들이 쏟아진다. 작품을 발표하는 이들은 자가도취의 작은 기쁨도 있겠지만 독자 입장에 서면 얼굴이 화끈거려 피곤하기 그지없다. 글이야 폄하할 수 없지만 여러 수 수만 번 우려먹은 퇴행성 어휘들을 잘도 꿰맞추고 있어 이미 뒷전으로 물러난 삼류 유행가 가사가 무안해질 정도다.
예를 들어보면 쪽빛 바다, 사무친 그리움, 정든 님, 고향, 포구, 고독, 뱃길, 영롱, 살포시, 눈물어린, 어루만져, 어머니 품, 한탄 등의 언어들이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다. 현대시의 깊고 맑은 사념과 손끝의 촉각 같은 연상의 빛은 어디 가고 감상에만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아마도 뉴 센티멘탈 시대가 오고있나 보다. 대중의 미디어인 신문도 이민사회의 문화를 위해 지면을 열고 있지만 내심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문맥을 무시한 수필이라는 괴물은 또 어떤가. 족집게로 어지럽게 뽑아 두루치기 한 소스들의 행렬 일색에 자기 자랑, 가족 자랑을 은연중 광고하기 일쑤다.
우연한 기회에 어느 문학지를 보니 서장의 화보에 고령의 멤버들이 권위를 내세우듯 늘어서 있다. 불쾌보다는 우려가 앞선 느낌을 받았다. 문학 한다는 것 자랑인가. 긍지는 좋으나 겸손이 없는 긍지는 시쳇말로 ‘뻥’이다. 흔히 보이는 원고 말미의 복합 명칭은 또 무엇인가. 시인 하나로는 양에 차지 않는다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만 해도 문학 예술의 장도는 고난의 길이 아니겠는가.
고국의 문단, (거기에도 엄연한 레벨이 있지만) 어떻든 그 문단에 줄을 대고 어찌 어찌해서 작가가 되었다면 그 내력만 교포신문에 밝히지 말고 그 작품도 함께 발표하면 대중의 평가를 진실하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있지만 작품은 낮도깨비처럼 널만 뛰고 있어 유감스럽다.
어느 해 뉴욕을 가다가 뉴저지의 휴게소에 있는 간이 식당에서 나는 얼어붙은 듯 한참을 서있었다. 그 식당의 벽에서 미국 시인 Joyce Kilmer의 사진과 그의 시 ‘Trees’를 보았기 때문이다. 1918년까지 뉴저지에 살았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벽에 붙여놓은 그 식당 주인의 배려가 하늘처럼 높아 보였다. ‘Trees’의 끝 절을 여기에 소개해 본다.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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