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기자
각 작곡가마다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특유의 대표작들이 있다.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으로 대변될 수 있다면 차이코프스키는 ‘비창(교향곡)’, 모차르트는 ‘돈지오바니’… 비발디는 ‘사계’등 각자의 대표작이 있다.
쇼팽(폴란드 1810-1849)의 경우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소품 ‘즉흥 환상곡’이야말로 쇼팽의 모습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쇼팽의 나이 24세 때 작곡된 이 곡은 귀가 멍멍할만큼 빠르게 전개되는 건반음이 기묘한 센티맨탈리즘으로 이끌어 가는데, 어딘가 비극적이고 기품이 서려 있는 서정미 등은 쇼팽의 대표작으로 꼽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쇼팽의 음악은 흔히 카페의 음악으로 불리 우며, 특별히 어려운 점이 없다.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고,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쇼팽의 음악의 특징이다. 이점이 쇼팽의 음악이 대중적인 음악이라고 비하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쇼팽이 펼쳐내는 건반음만큼 또한 나름대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품도 없다. 마치 ‘모네’의 현란한 색채에 비교될 수 있을까? 엺게 번지는 색채의 파노라마는 시각의 황홀경만큼이나 정신의 현란한 황홀경으로 이끌어 간다.
쇼팽이나 차이코프스키, 슈베르트 등은 음악에 있어서의 미학적 구도자들이었다. 선율적 시상에 있어 이들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남긴 작곡가들도 드물었다. 베토벤, 모차르트, 베르디 등이 음악의 예지, 초월적인 면을 부각시켰다면 쇼팽 등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해나간 작곡가들이었다. 특히 쇼팽의 경우는 지나치게 섬세한 감수성 때문에 센티멘탈리스트로 치부되곤 하지만 쇼팽만큼 또한 막힘 없는 음반의 마술을 통해 정신의 모난 부분을 부수고 아름다운 감성으로 거듭나게 해 주는 예술도 없었다. 쇼팽은 베토벤이나 브람스처럼 정화된 고급 예술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쇼팽만큼 미학적 도취… 열정으로 음악에 헌신된 작곡가도 드물었다. 쇼팽은 피아노와 여인들 속에서 찰라적인 음악을 수놓으며 폐병으로 시름하다 39세라는 짧고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비극을 따지자면 베토벤의 경우가 더욱 극적이고 강렬한 삶을 보냈지만 비극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베토벤(음악)과는 달리 비극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쇼팽의 다른 점이라고 할 것이다.
쇼팽은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수많은 녹턴, 월츠, 연습곡 등을 남겨 피아노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게되었다. 쇼팽 이후 피아노에 관한 한 쇼팽을 능가하는 작곡가는 탄생하지 못했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연마했고, 피아노의 대가적인 면모를 과시했으나 리스트, 라프마니노프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위대한 피아노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쇼팽은 피아노에 관한한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샘솟는 가락을 미친 듯이 오선지에 옮겨놓았다.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즉흥 환상곡(C#단조)’은 쇼팽이 남긴 4곡의 즉흥곡 중 4번째에 속하는 작품이다. 쇼팽이 파리에 거주할 때 작곡한 작품으로 현란한 즉흥성 때문에“즉흥환상곡”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곡이 너무도 환상적이고 아름다워서 쇼팽 자신도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감상적이었던 쇼팽은 자신이 죽으면 “즉흥환상곡’을 소각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의 명작을 미발표로 남긴 작곡가로서는 시벨리우스도 있었는데, 시벨리우스의 경우 자신의 마지막 작품(교향곡 8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불태워 영원히 사장시켰다.
쇼팽의 경우 ‘즉흥 환상곡’을 어떤 연유로 사장 시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쇼팽의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았던 ‘즉흥 환상곡’은 사후에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쇼팽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남게 됐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듣고 있으면 말 그대로 즉흥적인 막연한 감상이 솟아오른다. 특별히 슬픔이라든가 기쁨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으나 ‘즉흥 환상곡’만큼 또한 인생의 막연한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곡도 드물다. 현란하게 울리는 건반음은 울분의 표출, 세계에 대한 외로움… 그 비극을 잊고자하는 자기 최면처럼 들리기도 한다. 곡은 빠른 속도에서 급격히 슬픈 곡조로 바뀌어 마치 먼 방랑…의 여정이라도 떠나고 싶은 서정적 황홀경의 극치를 이룬다. 은빛 찬란한 선율미는 먼 꿈속을 헤매다 다시 환상적 선율로 끝맺게 된다. 쇼팽의 음악은 아마도 가을의 미학이리라… 질풍으로 치닫고 황혼으로 되돌아오는 존재…
즉흥곡은 즉석에 우러나오는 흥을 오선지에 옮기는 형식으로 슈베르트 이후 쇼팽이 가장 아름다운 즉흥곡을 남겼다. 슈베르트의 시적이고 서정적인 즉흥곡과는 달리 쇼팽은 보다 매혹적인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마치 가을의 반추라고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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