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숭 목사 (콘트라코스타한인장로교회)
필자는 지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아내인 힐러디 로댐 클린턴의 자서전(한글 번역판)을 읽고 있다. 정치라는 ‘필요악’ 같은 영역에 대한 염증 때문인지 정치가들의 글 읽는 것까지 기피하던 중 이 책을 접한 터라 뭐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대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진솔하고 재미있는 내용 때문에 시작부터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깔끔한 필치와 알찬 번역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비록 여행 중이지만 이른 시일 내에 이 두 권의 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음은 나의 마음을 자극했던 이 책 서문의 한 부분이다. “미국이 나머지 세계에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세계도 미국에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여행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장차 국내외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자주 듣지 못하는 목소리 - DNA나 생활수준과는 관계없이, 우리(미국)와 마찬가지로 기아와 질병과 공포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또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는 세계 도처의 사람들의 목소리 -를 이 책에 포함시켰다. 이 책의 상당부분을 나의 외국 여행 경험에 할애한 것은 사람과 장소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고, 외국 여행에서 배운 것이 오늘날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힐러리는 그녀의 퍼스트레이디 시절 8년 동안 미국의 모든 주와 78개 국가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랬기에 위의 고백이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필자도 지금 미국 여행 중이다. 물론 미국이 외국은 아니다. 하지만 15년이나 미국에 살면서 외국인처럼 살았던 나에게는 미국은 아직도 외국이다. 그래서 필자의 여행도 정서상으로는 힐러리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필자도 지난 한 달간 미국의 여러 곳을 갔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아직 한 달 더 남았다). 그러면서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힐러리의 표현대로,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이 지금의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곳이 가져다주는 나의 생각의 변화, “아 이런 곳도 있구나. 같은 미국이어도 이렇게 다르구나.”와 같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 같은 것 말이다. 그러면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만 같은 ‘나’라는 틀에 변형을 가하기 위해 그 틀 표면에 드디어 자연스럽게 끌과 정을 갖다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동부에 있다. 약 3주 전 서부에서 동부로 향할 때의 일이다. 정확하게 캔자스 주 중간 지점 어디서부턴가 어떤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건조함에서 다습함으로 바뀌는 경험이었다. 그러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끈적끈적한 습기 덩어리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자연도 그랬다. 거기서부터 건조한 너른 들판에서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들판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캔자스 오른편 끝 쪽부터는 완연한 밀림이 형성되었다. 마치 하늘의 법칙을 거슬릴 수 없다는 듯이 자연도 스스로 알아서 섭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발한 물은 구름을 형성하고, 구름은 비를 내리고, 내리쬐는 태양은 광합성작용을 일으켜 화초와 풀을 증식시키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중동부의 푸른 초장과 여름 소나기에서 오는 경험이었다.
약 10년 전 도미니카공화국에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다. 미국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의식주가 열악한 곳이었다. 그러나 부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풍부한 열대성 과일들이었다. 자르기만 해도 단물이 펄펄 나오는 파인애플을 비롯해, 자극적인 맛의 망고와 촉촉한 건강 물주머니 야자수 열매가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평생 야자수 물을 먹고 살기 때문에 도미니카엔 곱사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땐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베이지역이 누리는 천혜의 축복은 누구나 다 아는 바다. 항상 쾌청한 하늘을 대할 수 있는, 날씨 좋고 산과 물과 바다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이런 것들이 다 축복이 되진 않는다. 알러지 환자는 이 곳의 장기적 건조함 때문에 배로 고생한다. 타지와 비교할 때 화날 정도의 비싼 집값 때문에 많은 경제적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잘 살펴보면, 여기서 우리가 누리는 것을 타지 사람들은 누리기 힘들고,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쪽 사람들이 손쉽게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만큼 세상은 공평한 곳이다.
여행 전에는 내가 사는 베이지역만이 세상에서 최곤 줄 알았다. 그러나 여행은 그 환상을 자연스럽게 부숴주었다. 그러면서 나의 인격발전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힐러리처럼 ‘여기의 나’만큼 ‘그곳의 타인’도 충분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도 확인해가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세상은 그 어디든 살 만한 곳이라는 것!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단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인간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인간 측에서만 좀 생각을 고쳐준다면 세상은 어디든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감을 간직한 채 남겨진 여행을 마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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