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기자
겨울이 없었다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에 문호들이 많은 것도 러시아의 긴 겨울 때문이었다는 일설이 있을 만큼 예술과 꽁꽁얼어붙는 추위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음악의 경우, 음악을 즐기려면 우선 꽁꽁 얼어붙는 듯한 정신적 추위를 거쳐야 한다. 얼어붙는 추위, 외부의 극심한 자극이 없으면 정신은 내부로 향하기 힘든 법이다. 위대한 음악은 결코 쉽게 탄생되지 않는다. 극심한 겨울, 인고의 세월을 거친 뒤에야 겨우 한 줄의 선율이 새싹처럼 돋아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음악은 겨울의 황량함, 가난한 사람들의 예술이다. 순백색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 겨울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 속에서는 무엇이 뛰어나고, 특별한 것이 있겠는가. 그저 일체 적멸, 투명한 평안만이 있을 뿐이다. 순백의 겨울은 인류의 고향이다.
로망롤랑은 음악은 나의 첫 사랑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장크리스토프’의 저자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였으나 그가 선택한 삶은 순백의 음악을 반려자로 선택한 삶이었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이러한 오싹한 겨울 태풍을 느끼게 한다. 물론 겨울 서정의 색채감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살갗에 휘몰아치는, 이처럼 황홀한 곡도 없다는 뜻이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때 테잎이 닳고 닳아질 때 까지 듣고 또 듣던 작품이었다. 당시만해도 음악의 그 찰라적인 순간을 그처럼 아름답고 절실하게 표현한 작품도 없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 주는 형식성, 테크닉성… 음악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 바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바이올린을 거부하는 자들 조차도 브람스의 협주곡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만인이 좋아하는 작품일수록 개성이 없는 엿볼 수 없는 것이 명곡이 주는 약점이다. 브람스의 협주곡에는 그윽함은 있으나 어딘가 고독함이 빠져있는, 즉 명곡이긴 하나 개성을 엿볼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우 브람스에 빠져 있는 고독함, 개성과 추위가 흠뻑 느껴지는 곡이다. 너무 황량하여 자주 듣기에는 조금 무엇하지만 만약 가장 이상적인 곡이 있다면 브람스의 협주곡에 시벨리우스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라고 하면 맞을까?
시벨리우스(핀란드, 1865-1957)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핀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시벨리우스 최고의 역작중의 하나였다. 작품성이 뛰어나고 개성이 강하여 크게 대중화 되지는 못했으나 뭉크의 그림, 카프카의 문학에도 비교될 만큼 내면적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판이 높다.
시벨리우스는 대중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인틀, 특히 연주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자 중의 한 명이 바로 시벨리우스였다, 그것은 시베리우스의 음악이 모차르트처럼 투명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외적으로 튀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내면의 깊은 맛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벨리우스의 남긴 작품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관현악곡들은 먼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한 환상적 신비감이 깃들어 있다. 시벨리우가 꼭 북극(핀란드) 태생의 작곡가여서가 아니라 시벨리우스만큼 겨울서정을 통해 얼어붙은 세상을 따스하게 녹여주는 작품도 드물기 때문이다.
시벨리우스는 그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어쩐지 바이올린을 통해 아름다운 곡을 남기지 못했다. 그것은 통속적인 소리에 대한 반항, 자존심 때문이었겠지만 시벨리우스의 곡만큼 뛰어나면서도 결코 아름답다고 말해질 수 없는 곡도 드물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면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곡이라고할까, 북극인다운 기상은 일품이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차이코프스키·브람스의 협주곡에 비해 결코 아름다운 곡은 아니었으나 내면의 힘찬 기상, 관현악과 함께 터트리는 그 울분의 박력은 어느 대곡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바이올린이 관현악과 어울어져 이처럼 ‘大 바이올린 교향곡’을 연출해 내고 있는 것은 베토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벨리우스가 38세때 작곡한 이 곡은 테크닉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어렵다는 평이 있을 만큼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작품이었다. 관현악 파트가 특히 출중하며, 다른 협주곡들과 마찬가지로 1악장이 가장 길고 뛰어나다. 교향시 투오넬라의 백조, 타피올라등에서 엿 볼수 있는 북극의 어두운 곡조가 일품이며, 중반부 관현악의 함성과 함께 울분이 터져나오면서 곡은 정점에 이르게 된다.
전곡은 비교적 짧은 30분이며 전편에 흐르는 선율은 평화롭고 순백의 세계… 끊임없는 로맨티즘을 지향하고 있다. 일상의 일탈, 더위를 시켜줄 서늘한 아름다움을 갖춘 명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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