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국정홍보처의 고위 간부가 뉴욕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를 만나 얘기하다가 “개혁, 개혁 하는데, 노무현 정부의 개혁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특별한 것 있나요.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이지요”라며 얼버무렸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지 두달이 지나 한국에선 온통 개혁 바람이다. 여권에서는 개혁의 깃발 아래 신당 창당이 논의되고, 보수 세력인 한나라당도 개혁의 진통을 겪고 있다. 정치 개혁, 재벌 개혁, 언론 개혁... 가히 한국엔 개혁의 꽃이 만발한 느낌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부르짖는 개혁의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을 해외에 홍보하는 총 책임자가 무엇을 개혁하려는지를 적시하지 못하는 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혁의 현주소다. 노무현 대통령과 코드가 맞다는 유시민 의원도 자신의 당을 개혁당이라고 이름지었다.
노타이에 흰바지 차림으로 국회 선서를 시도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파시즘이라고 정의하는 그런 태도마저 개혁주의자인양 포장되고 있는 현실이다.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도 개혁을 외쳤다. 앞서 두 정부의 개혁이 성공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거창한 마스터플랜을 제시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정책을 집중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제화의 슬로건을 내세웠고,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 기업, 공공, 노동등 4대 부문의 개혁 과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선 다른 어느 정부보다 개혁의 목소리가 높지만, 구체적인 마스터 플랜이 없다.
한국이 온통 시끄럽다. 목청 센 사람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덤벼들고 있다. 학생들의 모범이 돼야 할 교사들이 정부의 전산화 체계 구축을 저지하겠다고 힘을 규합하고, 공무원마저 노조를 만들어 정부에 대들고 있다. 한총련 학생들은 혁명 전위대인양 대통령 행사를 방해하고, 개인 화물업자들도 노조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항만을 봉쇄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하기 힘들다”고 실토했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정권을 잡는 바람에 개혁의 내용을 정리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권 초기에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사회 세력들이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혁은 진보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혁에는 좌파 개혁과 우파 개혁이 있고,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성공적인 개혁은 보수 세력에서 나왔다. 영국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고치는데 성공했고, 미국에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시장 개혁을 단행, 90년대 장기 호황의 토대를 닦았다.
지금 세계는 3년째 장기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처음엔 금리 수단을 쓰다가 그것이 먹히지 않으니까, 재정 정책을 썼고, 지금은 달러 절하라는 또다른 수단을 쓰고 있지만, 당장 불황에서 탈출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 경제는 생존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이 세계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여부가 한국의 장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중국 경제는 뒤늦게 시장 시스템을 도입해 맹렬한 속도로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고 있지만, 모택동 시절에 문화혁명으로 20년간 낙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경제는 대단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시장 개혁이 실패하는 바람에 15년 가까이 슬럼프에 빠져 있다. 중국과 일본,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살아가려면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조금 배가 불렀다고 좌파적 문화혁명식 개혁에 빠졌다간 한국은 10년 이상 낙후할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미국을 다녀가면서 코드를 오른쪽으로 몇 클릭 움직인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 와중에서 진보의 기치를 내건 세력들이 반발하고, 개혁의 방향과 정의가 흔들리고 있지만, 차제에 개혁의 코드를 명확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미국과 영국의 보수세력들이 단행한 개혁에서 힌트를 얻을 필요가 있다.
파이를 똑같이 나눠먹자는 진보적 개혁 대신에 경쟁력을 높여 파이를 키우는 보수적 개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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