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기독교에서 부활절로 지키는 부활주일이다. 부활절은 2천년 전 예수가 사망한지 사흘만에 살아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부활은)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의 핵심사상은 2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부활사건과 십자가의 도를 들고 있다. 열 十 자 모양의 십자가는 사람을 처형하기 위해 쓰여졌던 나무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신과 사람의 화해를 위해 예수가 죽어야 했던 화해의 틀(十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못박고 있는데, 이는 십자가의 도가 그 무엇보다도 자기희생과 그 희생을 통한 업(원죄)의 소멸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독특하면서도 기독교의 교리를 가장 간결하게 해설하고 있는데 이 십자가의 정신이 본받을 만한 이유는 중도의식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자신이 죽을 권리와 살 권리가 있는 신의 아들(성자)임을 제자들에게 천명했다. 그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으며 스스로 낮아짐(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겸손의 표방이자 비참한 중생(죽을 수밖에 없는)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절망(죄업)의 소멸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높은 자도, 낮은 자도,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모두가 평등한 거듭난(영생을 얻은) 새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요사이 기독교계를 돌아보면 이러한 십자가의 중도(평등)의식은 찾아 볼 수 없다. 교회 내에서 행세하는 자들은 대체로 헌금을 많이 내는 자들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들이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대로 비굴하게 몸을 도사리고 있다. 자신의 약함을 통해 용기 있게 전도에 힘썼던 바울과 같은 신도는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은 육체의 질고(병마)가 있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었음에도 이방인에 복음을 전파하는 혁명적인 종교사업을 일으켰다. 그는 거듭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십자가의 정신을 발휘했다. 오늘날의 서구의 기독교가 이러한 바울의 약함과 강함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은 십자가의 정신에서 기인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신의 선택된 자들이라는 자만에 빠져 채 유독 배타적이고 절대 아니면 무라는 식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왕성하게 세력을 떨치고 있는 종교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세력이 아무리 강하고, 이상이 높고, 크다해도 그(십자가) 그늘 밑에서 음성적 교리(종교) 분쟁이나 일삼는 것과 타인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십자가의 정신은 정면으로 위배되는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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