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들어 집안의 대청소를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책들이 여기 저기 쌓여있어서 먼저 책장을 정돈하기로 했다. 오랜 세월 내 손때가 묻은 책들, 페이지마다 내 눈총을 받고 넘겨졌던 낡은 책들이, 지그재그로 섞여있다. 엘에이로 이사 오면서 대부분 추려냈지만, 아직도 오래된 책들이 제목을 내세워 줄줄이 서있다.
그 중엔 존경했던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주셨던, 단 한권밖에 없는 책도 끼어있다. 또 덴마크 철학자 키케고르(1813-1855)가 쓴 책 <이것인가 저것인가, 라이첼 출판사>는 19세기 출판된 원본으로, 사돈집에서 선물해왔기에, 잘 간직하고 있다. 또 지인들의 글과, 문인들의 책들과 많은 시집들이 줄줄이 서있다. 모두 귀한 작품들이다.
한 동안 책읽기에 파묻혀서 지냈던 적이 있다. 지금까지 인간 정신의 흐름이 궁금하다면, 책만이 그 속에 내밀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8;15 해방과 6;25 전쟁을 또 50년대와 60년대를 치룬 세대로서, 그 어려운 고비마다, 삶과 정신의 해방과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동화책부터 시작했던 책속의 세계였다. 그 속에서 문학이라는 빛나는 보석을, 내 환상의 피난처를 찾았었다.
책과 친해지면서, 책속의 세계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고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우리 주위를 감싸는 자연이나 애완동물에서도, 같은 감정을 교감하기도 한다. 삶이라는 책속에는 인간만의 고유 신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바람도 흔들리며, 강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베란다의 식물들은 내게 자주 손짓한다. 목마르다고, 햇빛이 그립다고, 추운바람에 화분이 쓰러진다고, 그들도 생명이라는 공통분모로 인간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정운찬서울대 총장은 총장직의 퇴임연설에서 “지난 몇 년 동안에 지식인에 대한 사회일반인들의 존경심이 식어가고 있음을 도처에서 목격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지식인의 약효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선견은, 현재의 AI문명에서라면 어떤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
지식인은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질문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프랑스 철학자 사르뜨르는 주장했는데, 현재시대는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과거에는 지식인의 역할이 “지식을 만드는 사람”이였다. 책과 강의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축적된 지식과 문명을 배우며, 세기를 넘는 전체를 파악하려 우리는 따라갔었다.
그러나 2026년 지금은 매일 바뀌는 첨단기술의 가치에서,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의 역할에서, 그 답을 얻으려한다. AI 문명이 어디까지 발전해 갈지, 기술의 세계가 인간의 존엄과 평화를 잘 지켜줄런지, 또 인간생존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앞으로 전 인류의 가는 방향을 선도해 줄지에 관한 지식인의 답에 집중되고 있다. “남의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내라. 남의 인생을 통해 쉽게 자기 자신을 개선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3천년이 지난 지금도 통용되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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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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