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텁편과 개성주악 그리고 오미자 화채
지난 2월 28일, 쿠퍼티노의 퀸란 커뮤니티 센터(Quinlan Community Center)에서는 아주 특별한 모임이 열렸다.
<살림으로 차린 연회>라는 주제 아래 <살림으로 뿌리내리다> 전자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단순히 책만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한 권의 책으로 기록된 제 명의 프로젝트 참가자들의 삶을 마주하고, 더욱 깊이 있게 나누는 자리였다.

살림으로 차린 연회장 풍경

살림 이야기를 나누는 장선용 요리연구가

열띤 패널톡 현장
이번 행사에는 프로젝트 기획 및 인터뷰를 진행한 필자(안미정)와 영문번역 담당 이고운 작가, 그리고 프로젝트에 참여해 준 네 분의 요리사분들이 참석했다. 행사 당일, 아쉽게 함께하지 못한 양지현 사진작가의 빈자리는 이지선 아나운서의 매끄러운 진행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특별히 장선용 요리연구가의 두텁편과 오미자 화채, 김진경 요리사의 개성주악과 단호박 식혜가 곁들여져 참석한 100여 명의 참가자들을 환대했다. 요리칼럼에 소개된 음식을 행사장에서 직접 맛본 참가자들은 그 맛의 깊이에서 느껴지는 정성에 감동했다고 전했다. 음식 끝에 정이나는 현장에서는 마주 않은 참가자들의 정겨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살림으로 차린 연회>는 글로 만났던 삶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사진으로 보았던 음식이 오감을 자극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매일 반복되지만 잘 기록되지 않는 살림의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식탁을 차리고, 가족을 돌보고, 낯선 땅에서 삶을 이어가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 수고로움을 당연시 여겨온 참가자들이, 바로 그 시간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온 가장 깊은 뿌리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챙길 수 있었다.
첫 번째 연사로 마이크를 잡은 장선용 요리연구가는 장 담그기 문화에서 시작된 살림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장은 하루 만에 만들어지는 음식이 아니다. 계절을 지나고 기다림을 견디며 완성되는 음식이다. 그 과정 속에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과 시간을 견디는 인내가 함께 담겨 있다. 장선용 연구가는 장을 담그는 손길이야말로 가족을 향한 가장 오래된 돌봄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연사인 사라킴-리 요리연구가는 미국에서 한국 식재료를 찾으며 겪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한인 마켓을 찾고, 때로는 낯선 재료로 익숙한 맛을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음식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는 언어가 된다. 그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음식이 어떻게 기억과 정체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지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어서 현재 산호세에서 SK hynix 한식 총괄 셰프로 일하고 있는 김진경 요리사는 한식이 가족의 식탁을 넘어 기업과 공동체의 식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한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문화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이자 노씨보자기 대표인 엘렌 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음식을 만들고 싸고 보자기에 감싸는 행위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돌봄의 태도라는 것이다. 음식을 싸는 일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기는 순간이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시간과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탈모에 관련한 에피소드를 전해 웃음을 자아냈다. 네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포용하는 지혜로 감싸지는 순간이었다.
나파밸리에서 와인을 만드는 박세실 대표는 특별 연사로 초청되어 포도나무와 이민자의 삶 사이의 닮은 점을 이야기했다. 포도나무는 낯선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땅의 성질을 품어낸다. 이민자의 삶 역시 그렇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그 땅의 시간과 함께 자라난다.
각 연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패널톡이 시작되기 전 준비된 다과를 나누며 간단한 네트워킹 시간을 가졌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누군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이민 초기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음식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시간을 떠올리는 경험, 그 경험이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이어서 다섯 연사가 다시 무대에 올라 패널 토크를 진행했다. “이주 이후의 삶에서 나를 살린 음식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자 각자의 기억 속 음식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어떤 이에게는 된장국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김치볶음밥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어린 시절의 떡 한 조각이었다.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였다.
행사 말미에는 뜻밖의 장면도 있었다. 3·1절을 앞두고 장선용 연구가의 제안으로 참석자들이 함께 만세 삼창을 외친 것이다. 살림의 시간과 역사적 기억이 한순간 겹쳐지는 장면이었다.
<살림으로 뿌리내리다>는 이민 사회에서 살림을 통해 가정을 돌봐온 이들의 시간을 글과 음식의 이야기로 엮은 프로젝트다. 그렇기에 <살림으로 뿌리내리다>는 한 권의 책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살림의 이야기를 가진 주체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살림으로 살아온 수많은 시간들이 여전히 기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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