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는 것은, 그곳이 어디라도, 떠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여행지는 감미로운 바람을 미리 불러와 때론 힘겹고, 간혹 지겨워진 하루도 휘파람 불며 너끈히 살아 내게 한다.
두 개의 식당을 운영하느라 여전히 바쁜 삶이다. 여행을 계획하다가도 이것저것 부담스러운 상황이 떠오르면 들떴던 마음을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고 일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나중에 나중에 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밀어 놓았던가? 가고 싶을 때 아무 걱정 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날이 가까운 미래에 곧 오리라 믿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삶은 조금 나아졌나 싶으면 다시 어려워지고, 이젠 숨 돌리나 하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다시 힘들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나이 육십 중반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계속 미룬다면 그날보다 죽음이 먼저 올지도 모른다. 삶의 속도를 늦추지 못한다면 쉼의 시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여행하기로 했다.
올해 여행지로 택한 곳은 알래스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역시 크루즈로 가기로 했다. 금요일에 시애틀 항구를 떠나 바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알래스카의 작은 도시 세 군데를 들른 후에 다시 시애틀로 돌아오는 7박의 일정이다. 미국의 가장 더운 지역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의 여행이다. 거리상으로도 가장 긴 대각선을 잇는 장거리다.
미리미리 짐을 싸 놓으려 했지만, 오래 가게를 비우려니 신경 쓸 곳이 많아 떠나기 전날까지 밤늦도록 가게에서 서성였다.
망망대해에서 꼬박 하룻낮과 밤을 보내고 셋째 날 아침에 알래스카 첫 항구에 도착했다.
유월의 알래스카는 초겨울이었다. 배가 정박한 부둣가에 빼곡히 서 있는 나무들은 찬 기운에 정신이 바짝 든 듯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다. 바닷가까지 내려온 산자락에는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산 정상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 내려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자연으로 들어갔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안달복달하던 나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가벼워진 걸음이 자연의 소리에 맞춰 춤추듯 박자를 탔다. 하늘은 청아했고 습하지 않은 공기가 나무와 꽃을 더 맑게 씻어 낸 듯 모든 것이 경쾌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매일 살면 좋겠다’ 라는 말이 현실감 없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이곳도 일상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감당해야 할 일’과 ‘살아 내야 하는 일’들로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을 알면서.
거대한 자연 경관에 그동안 지쳤던 내가 조금씩 씻겨 나가고 있었다. 내 삶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넉넉해지는 것 같았다. 돌아가면 같은 일상이 나를 기다리겠지만 돌아가는 나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역시 떠나오길 잘했다고 나 자신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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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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