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에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 2500명이 베트남 다낭을 점령했다. 베트남인들의 끈질긴 저항에도 1883년에는 사실상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2년 뒤에는 주권도 빼앗겼다. 오랜 식민 지배에 시달린 끝에 1945년 호찌민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악연은 끝나지 않았다. 식민 지배를 포기하지 않은 프랑스와 베트남민주공화국 간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땅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1973년 국교 수립 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의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달 7일 베트남 국가원수로는 22년 만에 처음 프랑스를 방문한 또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겸 국가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 동맹이 없는 베트남에는 최고 단계의 친선 관계다. 베트남이 오랜 시간 거리를 뒀던 프랑스와 밀착한 것은 남중국해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분석된다. 로이터통신은 프랑스와의 관계 격상이 베트남 ‘대나무 외교’의 성공 사례라고 짚었다.
‘대나무 외교’라는 표현은 2016년 베트남 제29차 외교회의에서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이 “호찌민 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나무의 특성을 지닌 독특한 외교 노선을 수립했다”고 언급한 데서 비롯됐다. 굳건한 자주 원칙과 유연한 전략으로 자립과 국제 협력의 균형을 추구하는 외교 전략을 단단한 뿌리와 튼튼한 줄기, 유연한 가지가 있는 대나무의 특성에 빗댄 것이다. 세계 191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넓은 외교 지평은 ‘대나무 외교’의 성과물이다. 베트남이 13일 자국을 방문한 리창 중국 총리를 환대하고 철도 개발 협력 등 경제·외교 협력 확대를 약속한 것도 베트남 특유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한미 동맹을 외교의 핵심 축으로 삼는 우리나라는 베트남과 같은 외교 노선을 걸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커지는 글로벌 정세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면서 안보를 튼튼히 하려면 확고한 한미 동맹의 기반 위에서 실용을 추구할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신경립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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