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 (24) 도공과 도자기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달한‘인상주의’ 화풍을 시작한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일본 기모노를 입고 있는 자기부인 카밀을 모델로 그린‘1876 Claude Monet: La Japonais’ 그림. 당시 조선 도공의 후예들의 작품인 일본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할 때 도자기 포장지에 그려져 있던 판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2018년 1월30일 미국 3대 미술관의 하나인 보스톤 파인아트 미술관 특별전시 중 촬영.

8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배워 경상북도 문경에서 7대째 가업을 이어 도예가로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명장이자 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 묵심도요(黙心陶窯) 이학천(李鶴天) 도공이‘우주’라는 이름의 백자 항아리 완성 작업을 하고 있다.

이학천 도공이 한국의 등불 호롱을 나무로 만든 목기의 느낌이 나도록 도자기로 제작 출품해서 대한민국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작품.

이학천 도공의 '청화백자 연 화조문 대접' 작품.

이학천 도공이 재현한 이도다완(井戶茶碗). 임진왜란을 다른 이름으로는 다완전쟁(茶宛戰爭)으로 불려지게 한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시작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 스승이였던 센리큐(千利休) 가 화려한 찻잔 대신 추천했던 소박한 조선 막사발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고 한다.

이학천 도공 이 차를 마시며 “도자기가 이제 조금 느낌이 옵니다. 창조는 무한”이라고 이야기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전북 남원 출신인 심수관(沈壽官)의 후손 작품 ‘조선통신사’ 향로. 영천역사문화박물관(관장 지봉스님) 소장품.

청동기시대에 한반도 남부 전역에 분포하였던 대표적 토기 중에는 구멍무늬 토기가 있다.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에 있는 서천송내리유적(舒川松內里遺蹟)에서 발굴된 장란형 토기는 주거지에서 가장 출토율이 높게 나타나는 종류다.

말 탄 사람 장식 토기 - 삼한시대, 마한시대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컵 모양 그릇. 점토띠로 만든 손잡이를 붙이고 그 위에 말을 탄 사람 모양 장식을 달았다. 충주시 금릉동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변기 모양 토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분청사기 연꽃 물고기무늬 병.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삼국시대의 독무덤(甕棺墓)으로 큰항아리, 독널이라 불리는 옹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많이 쓰였고, 선사시대와 청동기시대부터 독특한 양상의 한반도에 분포 한 독무덤 항아리이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한국의 도자기는 인류 역사와 같이 만들어온 생활품이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술품이다. 도자기는 생활 예술품으로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로 많이 지정되었다.
조선을 쑥밭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 때 침략군들은 소박하고 정교한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사기장)들과 연장과 무기를 만들어온 대장장이 등 수많은 기술자들을 1593년과 1598년 2차례에 걸쳐 일본 열도(日本列島)로 납치해갔다.
모국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천대받던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최고의 신분인 사무라이까지 신분이 상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자진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공도 있었다.
훗날 조선인들을 귀환시킬 목표로 일본을 방문한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직(1577~1640)은 “삶이 안정된 이들은 귀국의 뜻이 전혀 없었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 전북 남원 출신 도공 심수관(沈壽官)의 후손이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본으로 끌려간 첫 조상의 이름으로 15대째 도자기를 굽고 있고, 1990년에는 조상의 모국에 찾아와 김치항아리 만드는 방법도 배워갔다.
동아시아에서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차 문화 속에 차원 높은 다도(차 마시는 의식)를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차 전용 사발, 곧 찻사발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투박하고 소박한 막사발은 우리 문화에서는 밥그릇, 제사용 그릇으로 쓰였고,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죽으면 같이 묻어주던 흔한 사발을 조선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는 이도다완(井戶茶碗) 또는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 부르며 여러 무사들이 차 한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독살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달한 화풍 ‘인상주의, 인상파’의 원조 화가 클로드 모네가 자기 부인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 있다. 일본 여성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서양 여성 모습을 그렸는데 하단에는 사무라이 우화를 표현했다.
그 당시 최첨단 수출품 도자기를 일본에서 유럽으로 운송할 때 보호하는 포장지로 일본 판화 그림을 썼는데, 그 포장지를 유럽 사람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일본 전통 그림을 연구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손들이 만든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일본 그림들이 알려지져 서양 미술의 흐름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가 있는데, 도기는 단순한 점토를 재료로 빚을 수 있지만, 자기에는 장석류 등의 광물 비율이 높은 고령토가 필수다.
일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고령토가 흔하게 있는 경상북도 문경에서 7대째 가업을 이어 도예가로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명장이자 지정 무형문화재 보유자 ‘묵심도요(黙心陶窯)’ 이학천(李鶴天) 도공은 일찌기 도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성을 인정받은 도공으로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8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배워온 도자기 공예명장 이학천이 아버지 이정우님으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말이 있는데, “농부가 성심으로 농사를 살펴야 좋은 결실을 얻듯이, 흙을 빚을 때 또한 성심이 담기고 깃들어야만 도공의 자세”라 하셨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다른 이름으로 다완전쟁(茶宛戰爭)으로 불려지게 한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시작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었던 센리큐(千利休)가 화려한 찻잔 대신 추천했던 소박한 조선 막사발이라고 한다.
현 시대에 이도다완(井戶茶碗)을 특별하고 훌륭하게 재현해내는 재주가 있는 사기장 이학천 명장은 독학으로 공부한 그림 실력을 마음껏 반영한 작품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를 ‘도자기 국가’라고 부르는 이학천 명장은 “도자기가 이제 조금 느낌이 옵니다” 라며 “창조는 무한”이라고 이야기한다. 7대 이학천 명장의 도예가문 계보를, 8대에서는 조카딸들인 이은비, 이은미씨가 전통을 이어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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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우리·문화·역사 Visual History & Culture of Korea 전체 프로젝트 모음은 다음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kang.or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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