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 1월 태평양 오아후섬에 이방인이 발을 내디뎠다. 18세기 후반 태평양 항로를 개척한 영국 출신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 일행이었다. 목가적인 정취에 반한 쿡 선장은 평생의 후견인이었던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 제도’라 명명했지만 원주민들은 원래 이름인 하와이로 불렀다.
하와이는 5세기 무렵부터 폴리네시아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제도(諸島)로, 8개의 주도와 100여개의 작은 섬들로 이뤄졌다. 1851년 카메하메하 3세에 의해 미국의 보호령이 됐고 1887년 미국은 해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하지만 1897년 마지막 왕인 리디아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인 농장주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농장을 국영화하자 그를 추방한 후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오아후 남쪽에는 진주처럼 빛나는 바다가 있다. 수백년 동안 이곳에서 진주조개를 캤던 원주민들은 ‘와이모이(Wai Moi·진주의 바다)’라고 부른다. ‘물’ 혹은 ‘공동체’라는 의미의 ‘와이(wai)’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모진 풍파를 견디고 살아온 원주민의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원래 ‘와이모이’는 수심이 얕아 항구로 쓰지 않았다. 이곳에 미국 해군기지가 들어선 것은 1908년. 이후 준설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미 태평양 함대의 모항으로 자리 잡았다. 대규모 해군 조선소도 이곳에 있다.
1941년 12월7일 일요일 오전7시55분, 고요했던 ‘진주의 바다’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 360여대의 기습으로 21대의 미군 전함과 188대의 비행기가 파괴됐다.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USS애리조나호가 침몰하면서 1,177명의 수병 중 1,102명이 목숨을 잃는 등 2,40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중립을 지켰던 미국은 이를 계기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비극적인 전쟁은 막을 내렸다.
7일 하와이 USS애리조나기념관 등지에서는 진주만 공습 78주년을 맞아 일본의 공격에 희생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렸다. 2차 대전의 아픔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벌써 잊은 것 같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중심으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이 남긴 뼈아픈 교훈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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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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