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촌 백관수 선생(1889.1.28-1950.10.25)은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이후 언론과 정치 활동을 통해 민족의 자존과 독립정신을 지켜낸 대표적인 애국자였다. 그는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민족의 기개를 지켰고, 일제의 언론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민족 언론의 책임을 다했다.
선생의 삶은 끊임없는 탄압과 투옥의 연속이었다. 1919년 2·8 독립선언 사건으로 체포되어 1919년 2월 8일 구속된 뒤 1920년 3월 9일에 석방되었다. 이어 1928년 조선일보 필화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벌금 100원의 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보석지연(保釋遲延)의 희생, 공산당 사건의 실례를 견하라」라는 논설이 문제가 된 것으로, 신의주 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경찰의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를 비판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은 안재홍에게 금고 4개월, 근촌 백관수 선생에게 벌금 100원을 선고하였다.
또한 1940년 동아일보 강제 폐간 당시에도 선생은 총독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1939년 말 총독부는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과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을 불러 자진 폐간을 강요하였다. 두 신문사는 이를 거부했지만, 총독부가 용지 통제와 간부 구속 등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결국 폐간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백관수 선생은 1개월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는 전시 총동원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제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민족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 목소리를 지키려 했던 이러한 노력은 동아일보를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국민의 등불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타국의 하늘 아래에서 고국의 산하를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며 작성된 2·8 독립선언문에는 조국 독립을 향한 절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 선언은 곧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청년 유학생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전국으로 번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근촌 백관수 선생은 바로 그 불씨를 처음 지핀 세대였다.
그리고 약 20년 뒤, 같은 독립의 정신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인 윤동주가 등장한다. 그는 일제의 감시때문에 선언문을 쓰지 못했고, 거리에서 만세를 외치지도 못했지만, 시를 통해 민족의 양심을 지켜낸 청년이었다.
백관수는 독립의 불을 붙인 세대였고, 윤동주는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마음으로 지켜 낸 세대였다. 선언으로 시작된 독립의 의지는 양심으로 이어졌고, 행동의 외침은 시인의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졌다.
백관수의 2·8 독립선언이 역사의 문을 열었다면, 윤동주의 시는 그 문을 지나며 잃지 말아야 할 민족의 내면을 조용히 밝혀 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 위에 서 있다. 한 사람은 앞에서 길을 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그 길의 의미를 지켜 냈다.
선언은 바람처럼 퍼져 나갔고, 시는 별처럼 오래 남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한 민족의 독립 정신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이어졌다.
윤동주 시인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근촌 백관수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공적 역할을 이어갔다. 그는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제헌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아 신생 대한민국의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북한에서 1950년 10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이 “당시 민중들은 동아일보를 한국의 정부처럼 여겼다”고 회고했을 만큼, 백관수 선생이 지닌 사회적 위상은 컸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한국전쟁 중 납북이라는 비극 속에 묻혀 오랫동안 역사적 평가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근촌 백관수 선생은 어둠의 시대에 민족의 자존을 지켜낸 우리 현대사의 거인이었다. 그는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며 3·1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동아일보 강제 폐간의 압력 속에서도 민족 언론의 등불을 지켜냈다. 그의 삶은 국외 망명이 아니라 한반도 내부에서 끝까지 버텨낸 치열한 저항의 역사였다.
근촌 백관수 선생이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독립유공자인가. 그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수호, 그리고 해방 후 국가 건설 참여까지 이어진 헌신의 기록이다.
이제는 역사적 평가가 온전히 이루어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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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웅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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