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해놓고서, 대중이 보지 않는 은밀한 공간에서는 자기 권력을 활용해 성욕을 채우는 자칭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얼마 전 유명 코미디언 루이스 C.K.가 후배 여성 코미디언들을 성추행했던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의 사건이 유난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그동안 그가 남자들의 위선을 풍자하고 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코미디로 큰 인기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여성의 인권 신장을 지지한다고 밝혀온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도 캐스팅을 빌미로 수많은 여배우들을 성추행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들의 이중성을 ‘역겹다’는 말 외에 어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뻔뻔한 남자들 덕분에 우리는 ‘과연 남자 페미니스트란 가능한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게 됐다.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수혜자이자 온갖 지저분한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이기도 한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남자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의심과 미움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인기 없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관심을 얻으려고” 혹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인기 영합성으로” 페미니즘 발언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성평등을 지향하는 남자들이 ‘어차피 난 남자니까’라는 자포자기식 결론으로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자각이 성평등을 향한 남자들의 발걸음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성평등을 지향하는 남자들이 ‘남자’라는 자신의 실존적 조건과 한계를 자각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너무 심취해서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여성의 구원자’라도 되는 양 과시를 하다가 사고를 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심각한 사고를 치는 자칭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있을 것이고, 이는 남자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강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억울해하지는 말자. 다른 남자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고들을 ‘내가 남자라서 다른 페미니스트들보다 실수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라는 사실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남자에게 사고방식의 개변이 일어나도 생활의 관성에 의존하다 보면 페미니스트라는 지향은 그야말로 말에 그치게 된다. 나에게 집안일과 육아를 동등하게 분담하라고 강제하는 사람이 나타날 리도 없고, 여성 경쟁자에게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게 무슨 의무로 부과될 리도 없다. 주변사람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내 이마에 성평등과 관련된 문구가 멋있게 새겨지는 것도 아니다.
여성들의 눈에 나는 여전히 밤길에 마주치기 무서운 시커먼 남자로 보일 거다. 남자 페미니스트는 잠깐만 방심하면 주변의 여성들을 착취하는 또 한 명의 나쁜 남자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비롯한 동료 남자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떠안는 걸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이 그저 말뿐이라는 일부의 지적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오로지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자꾸 밖으로 내뱉으면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된다. 앞으로의 사유와 실천이 이전에 했던 말들에 구속을 받기 때문이다. 성평등과 관련해서, 약속할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도록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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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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