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가을밤이었다. 유난히도 무겁던 북 카페 문을 낑낑거리며 열었다. ‘저자와의 만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읽고 “저자와의 만남” 행사에 참가하며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건 글쓴이 중 한 명이 말했던 엄마 이야기였다. 가난, 종교, 편견, 여성,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의 굴레에 겹겹이 쌓여 있었던 엄마 이야기. 글쓴이의 엄마는 여러 차별 및 억압에도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고 그저 무디게 감내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글쓴이의 엄마는 어쩌면 그 일이 부당하다고 인지할 수조차 없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이야기를 이어가던 글쓴이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엄마와 같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서 공론장에 남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언어를 찾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언어를 찾으려면 일단 언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하나의 모국어를 구사한다. 읽고 쓰는 글말은 하지 못하는 문맹이라도 입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가 없다니? 말을 유려하게 하지 못한다는 걸까? 상황에 맞는 화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까?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언어를 찾는”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의외로 책장에 꽂혀 있었던 연구방법론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모국어를 쓸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언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경험을 풀어낼 수 있는 적절한 표현 수단이 없고, 언어로 풀어낸다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표현 수단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르고, 표현해냈다 해도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 허공의 메아리가 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아마 글쓴이의 엄마도 그랬을 거다. 경험을 언어로 풀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지도 모르고, 그랬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약자나 소수자가 세상을 살아내며 익혀온 언어와, 사회에서 널리 인정받는 언어는 다르다. 연구방법론 책에 실려 있던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북한에서 탈출한 후 남한에 정착해 살아가는 여성, 10대 위기청소년 센터에 입소해 있는 여성, 4.3 사태로 남편을 잃고 무당이 된 여성 등.
이들은 비속어와 사투리는 기본이고, 문장 성분의 호응이 제대로 맞지 않는 거친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언어 속에 실려 있는 경험은 더 투박했고 때로는 섬뜩했다. 이들은 살아오면서 거친 언어를 익혔고 힘든 경험을 했을 뿐인데, 이 사람들의 말을 내가 사회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이 사람들의 언어와 경험은 환영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니까. 말 그대로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니까.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라고 생각해 왔었다. 어휘, 문법, 독해, 말하기, 글쓰기 등을 폭넓게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언어라는 도구를 더 유려하고 세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왔었다. 그러나 강의실 밖의 세상을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이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정제된 언어로 말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는 경험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나 자신 역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언어는 있지만,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함께 들었다.
서늘한 가을 밤, 한 권의 책과 “저자와의 만남” 행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었다. 언어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았고,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분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북카페의 무거운 문만큼이나 무거운 교훈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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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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