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언어는 사고의 도구라고 한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서 사고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타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한 달 전 핀란드의 헬싱키 대성당을 방문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어느새 탁 트인 광장이 눈앞에 보였고, 갖은 장식을 한 펭귄 동상이 일렬로 줄지어 서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우뚝 서 있었고, 동상 뒤편에 폭이 넓은 계단이 층층이 이어졌다.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계단에 앉아 쉬거나, 담소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계단 너머에 있었다. 파란 하늘을 그대로 닮은 듯한 커다란 옥색 돔 지붕과 그 아래 네 개의 작은 돔 지붕이. 지붕을 떠받치는 새하얀 벽과, 입구 앞 새하얀 기둥 여섯 개도 함께. 나는 웅장한 대성당을 아래에서 바라만 보다가, 계단을 뛰어올라가 기둥을 끌어안아 보았다.
그러는 도중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말을 걸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내 사진이 어떻게 쓰일지 몰라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하면 만에 하나 해코지라도 할까봐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헬싱키 대성당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이로움이, 내 어깨에 닿던 낯선 남자의 손 때문에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사고는 총체적이다. 내가 헬싱키 대성당에 갔을 때를 떠올리면 머릿속에는 풍경, 느낌, 하늘의 이미지, 일렬로 서있던 펭귄 동상, 옹기종기 앉아 있던 관광객들, 차가웠던 기둥의 감촉, 웅장함, 경이로움, 불쾌함, 하얀색, 옥색 같은 것들이 총체적으로 떠오른다.
반면 언어는 순차적이다. 사고를 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헬싱키 대성당’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꺼내고, 지붕 돔 벽 계단 등등 건물의 각 부분을 가리키는 명사를 찾아내고, 내가 본 걸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수식어를 꺼내 붙이고, 한국어 문법의 순서에 맞게 문장 성분을 나열하고, 읽는 사람이 내가 느낀 걸 그대로 따라올 수 있도록 문장의 순서를 짜 맞추고, 마지막으로 글을 다시 읽어 점검해야 한다.
언어로 사고를 풀어낸다는 건, 총체적인 사고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이다.
언어로 표현된 사고를 읽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역순으로 따라가게 된다. 순차적으로 배열된 문자와 문장을 조립하여 총체적인 사고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과정을 거친다. 내 의도를 따라가면서 헬싱키 대성당의 이미지와 내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려볼 수도 있고, 글을 읽으며 자기 자신의 의견 경험 느낌을 겹쳐 볼 수도 있다.
가령 헬싱키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비가 내려서 습했던 느낌이나, 다른 성당에 갔을 때의 기억, 관광하다가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 불쾌했던 경험 등등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언어로 전달된 사고는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다시 총체적으로 재조립된다.
언어는 사고의 도구가 맞지만,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언어는 사고를 순차적으로 풀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라고. 종종 머릿속에 사고하고 있는 걸 상대방에게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그건 총체적인 사고를 순차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국어로 풀어내기는 쉽지만 영어로 풀어내기 어려운 것은 영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데 한국어만큼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 외에도 사고의 도구는 수없이 많다. 안무가라면 춤과 움직임으로, 화가라면 색과 선으로, 공학자라면 수식과 도표로, 음악가라면 음정과 박자를 주로 사용해서 사고한다. 우리는 이 모든 도구를 사용해서 총체적으로 사고한다. 언어는 사고를 순차적으로 풀어내는 걸 도와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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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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