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외대 정진석 명예교수, 독립협회 120주년 학술대회서 발표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1864∼1951)은 미국 시민권을 이용해 한국에서도 철저히 '미국인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종종 비난받는다. 그러나 서재필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의 가감없는 정부 비판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5일 독립협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앞두고 미리 배포한 발표문 '독립신문 창간의 역사적 의미'에서 "독립신문은 서구 신문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룩한 언론의 비판기능을 출발단계부터 도입할 수 있었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정 교수는 "서재필이 권력과 정부를 향해 과감한 비판을 하면서도 신분을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시민이라는 신분 때문"이라며 "서재필이 한국인이었다면 관존민비의 당시 관습상 비판이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1885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이 된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제손' 또는 '졔션'이라는 이름을 썼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는 갑오년에 환국한 뒤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고 썼다.
정 교수는 "우리 정서로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면서도 "서재필이 미국에서 체험한 언론 자유의 개념에 따라 신문을 발행했기에 그 이후 나오는 신문들도 같은 수준의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그는 영문판 독립신문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발행을 한글판 못지 않은 업적으로 평가했다. 정 교수는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는 조선의 입장을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며 "국가적 사업을 서재필이 대행한 격"이라고 말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21세기적 의미'에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근본적 원인을 친러 수구파의 무력탄압, 시민층의 미성숙으로 파악했다. 농민층을 끌어들이지 못한 채 도시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한 점도 실패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저지하고 민주주의·공화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등 독립협회 운동이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봤다. 신 교수는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은 이미 19세기 말에 한국인들 스스로 자주독립한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발전시킬 구체적 방안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동양정치사상사학회가 주최하는 이번 학술대회는 7일 오전 10시 한중연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 윤대식 한국외대 교수, 김종학 서울대 교수, 김현숙 건양대 교수 등도 발표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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