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대학 졸업한 서병규씨
▶ 여덟번째 며느리 서미자씨, 시아버지 삶 조명
1938년 막내딸을 안고 10 남매가 한 자리에 모였다(가운데가 장남 서정익 부부, 오른쪽에서 2번째가 8남인 서정필씨)
8 번째 며느리인 서미자 간호사
노동절인 지난 1일 예일 병원에서 38년을 근무한 후 은퇴한 서미자 마취사간호사를 만나 미국에서 두 번째로 대학을 졸업한 한국인으로 기록된 그의 시아버지 서병규 선생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1872년 한성 서대문구에서 태어난 서병규 선생은 어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한학을 공부했고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는 14세에 결혼을 하여 17세에 첫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 20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1892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온 후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 참석차 미국에 온 정경원 내무부사의 통역으로 발탁됐다. 통역을 위해 시카고에서 머무는 동안 우연히 만난 버지니아주 샐램(Salem)에 있는 로어넉 대학교(Roanok College)의 줄리우스 드레허(Julius Dreher) 총장을 만나 그 대학교에 1894년 입학을 했다. 입학 후에는 고종 왕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29명의 졸업생 중 2등으로 졸업한 서병규 선생은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기록을 남겼다. 처음으로 졸업한 변수는 1891년 메릴랜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4개월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 선생은 귀국하여 한국에서 일 할 것을 종용 받았으나 이를 사양하고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한 후 1899년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왕실 궁내부 전화국장으로 취임을 받고 잠시 일을 한 후 중앙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성공업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자 관직에도 취임하여 한국이민국장, 농상공부 상공국장, 인천 감리(시장)와 민, 형사 재판소 판사를 역임하였으나 개화파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됐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해 영국 해무청에서 일을 했으며 연해세관 부위원장의 직책을 마지막으로 1938년 은퇴를 한 후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정부와 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한 뒤 1952년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10남매를 두었다. 8번째 며느리인 서 간호사의 남편인 서정필 생물의학 기사는 예일 병원 임상병리실에서 혈액검사를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하고 연구했으며 10년 전에 사망했다.
서 간호사는 현재 시아버지인 서병규 선생을 중심으로 한 10남매에 대한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으며 이를 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곽건용 지국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