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42세 때, 내가 10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자신의 6남매를 시어머님께 맡기고 떠나셨으니 어머님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때, 아버지의 침통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우리와 같이 사시던 친할머니는 말씀이 적으시고 조용한 분이셨는데 나는 항상 할머니에게 불만이 많았다. 다른 집 할머니들은 손주들에게 늘 따뜻이 대해 주는데 우리 할머니는 왜 저다지도 냉랭하실까? 할머니에게는 외손녀가 여럿 있었지만 친손녀는 나 하나뿐이었는데 나에게는 늘 쌀쌀하신 것이 내 마음을 늘 상하게 했다.
하루는 학교 갔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나를 부르시기에 방에 들어가니 “이리 와서 이 실타래나 풀어라”하시면서 큰 광주리를 나에게 내미셨다. 그 안에는 흰색의 가는 실들이 엉켜져 있었다. “할머니! 무슨 실이 이다지도 가늘어요?”하고 여쭈니 “그 실은 명주실이다”하시곤 말씀이 없으셨다. 헝클어진 명주 실타래를 푼다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고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어린 마음에 ‘무슨 할머니가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시키시나? 왜 할머니는 저러실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끙끙 하면서 결국은 다 풀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니, 할머니는 또 다른 일감을 주셨다. 할머니는 바느질 바구니를 내 앞에 밀어 내시면서 “해진 버선들을 꿰매거라. 여자는 항상 아까운 것을 알아야 되느니라”하셨다. “할머니! 버선을 어떻게 꿰매나요?” 할머니는 나에게 바느질 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일이라 그저 숭덩숭덩 꿰매니 할머니는 다시 실밥을 뜯어 마음에 들 때 까지 자꾸 시키는 것이다.
하루는 양말 보따리를 내어 놓으시며 “오늘은 이 전기 다마를 양말 속에 집어넣고 구멍 난 양말들을 다 꿰매거라”하시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좀 재미가 있었다. 그 때가 중학교 2학년 올라가기 전 쯤 이었는데 학교에서 가사 시간에 ‘수 (繡)’를 놓게 되었는데 나는 엄한 할머니 덕택으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친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결혼한 후에야 순간순간 할머니가 엄마 없는 나를 가르치시려고 바느질이면 바느질, 여자로서 해야 할 모든 것을 가르치시느라 그토록 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헝클어진 명주 실타래를 풀도록 하신 것은 참을성, 인내심을 키워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할머니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가장 귀한 선물을 나에게 주셨다는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면서 할머니가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셨다는 생각을 하며 가끔씩 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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