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창문을 닫지 마!” 라고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 났다. 내 꿈의 태반이 연극하는 꿈이지만, 오늘 꿈은 연극꿈이 아니다. 나는 커텐을 열고, 은행나무 거리로 불리우는 내 집 앞 거리를 내다 본다. 희뿌옇게 새벽이 열리고 있다. 많은 그루의 은행나무 중에 등치가 제일 큰 우리집 앞 은행나무! 지난 가을만 해도 수많은 은행잎으로 기워진 화사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서 있던 나무가, 이제는 그 은행잎을 모두 떨구어버리고는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 처럼 홀랑 벗은 나목(裸木)의 여왕이 되어 초겨울 바람에 오돌오돌 떨고 서 있다.
나는 옷을 주섬 주섬 주워 입고 글쓰는 방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닫지 말라고 소리 쳤던 그 창문은 어제 밤 그대로 닫혀 있다. 그러나 검푸른 잎만 담장을 덮고 있을 뿐, 역시 능쿨꽃 부겐빌리아는 다 떨어지고 없었다. 내가 꿈결에 창문을 닫지 말라고 소리친 건 어젯밤 글쓰다 말고 뒤돌아 본, 이미 저버린 부겐빌리아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늙은 목공이 다듬은 한 토막의 나무 토막이, 피가 흐르는 ‘피노키오’란 장난꾸러기 소년으로 태어 났듯이, 내 작품세계에서 부겐빌리아는 내 손자 손녀들의 어릴적 예쁜 모습 같이 태어 나 내 뒷창문을 통하여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17년 세월 동안, 이 할애비와 끝도 한도 없는 가을 이야기를 이어 왔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따라 간 그놈들이 다시 돌아오는 또 다른 가을을 기다릴 것이다. 그 옛날 방학 때마다 내가 찾아 오기를 기다리던 할머니처럼 말이다.
나는 방학 때면 방학숙제장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는 할머니가 계시는 큰아버지 집으로 달려 갔었다. 지금의 창원공업단지 한 모서리의 간이역인 성주사역에서 홀짝 뛰어 내려 손님을 내려 놓고 마산 쪽으로 멀어져 간, 기차의 철길을 깡총깡총 뛰어 걸어 갔었다. 그러다가 ‘살포정’이란 고갯마루 길로 빠져나가 할머니 집으로 걸어가면서, 길가에 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이란 나무장석 옆의 돌무덤에 돌을 던지면서 그때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리고 길 옆의 물방울이 담긴 망개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툭 퉁기던, 내 어릴적의 티끼 없는 장난끼가 지금도 이 늙은 입가에 웃음의 주름을 지게 한다.
그런데 내가 할머니 집으로 향해 걸어 가던 그 길은 그 옛날 빈농(貧農)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가 15살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의 길을 가기 위해 진해(鎭海)로 향해 걸어 갔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방학의 태반을 할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할머니 방에서 잤다. 왼쪽 빰에 엽전 크기의 파란 점이 있고, 입까지 약간 삐뚜러진 할머니였기에 남들은 못 생겼다고들 했지만 내 눈에는 하나도 못생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 이불 속에 파고 들어, 바람 나간 풍선 같은 할머니의 젖을 쪼무락 쪼무락 만지작 거리면 할머니는 내 엉덩이를 토닥 토닥 두들겨 주면서 “내 강아지 새끼“라고 했다. "할매, 난 사람인데 와 강아지 새끼라 카노?“라고 물으면, ”니가 강아지 새끼 같이 이뻐서 안 그라나“ 라고 대답한다. 나는 ”아 그렇구나“ 라고 다시 할머니 품에 파고 들기도 했다. 이러한 할머니와 내 어릴적의 대화는 어쩜, 지금의 나와 내 창가의 능쿨나무와의 대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중에 내가 소변이 마려울 때는 할머니 머리 맡에 놓여 있는 분지(요강)에다 누었지만, 대변이 보고 싶을 때는 무서움을 잘 타는 나를 바깥채의 소 마구간에딸린, 통시(변소)까지 데려가 주었다. 여름방학 때 어쩌다 비가 오는 밤이면 할머니는 치마폭을 걷어 올려 비옷 같이 내 머리와 온 몸을 덮어 주었고, 또 추운 겨울 밤에는 내가 늘판지 뒷깐에 앉아 용변을 끝낼 때까지 추위를 견디기 위해 팔짱을 끼고는 마굿간과 변소 사이의 기둥에 기대 서서 기다려 주던 할머니의 그 정(情)이 새삼 그리워 진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