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아까도 먹었는데 이따 또 먹어야 한다’는 사실 정도이다.
삼십 년 전에 내가 처음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만났던 여성들은 거의 다 조리법을 정리해서 모아 둔 상자를 갖고 있는 듯했다. 미국에 오니 양념도 참 여러 가지였다. 미국의 조리법은 오븐에 넣고 몇 도에 몇 분 동안 구워라는 물론이고, 식재료를 오븐에 넣기 전에 미리 몇 도로 가열을 하라고… 또, 무슨 양념을 어떤 크기의 숟가락으로 얼만큼 넣으라고 정확히 그리고 상세히 알려 준다.
그에 비해 한국의 조리법은 자못 시적(詩的)이다. ‘조물조물’ 무치고, ‘솔솔’ 뿌리고, ‘살짝’ 데치며, ‘달달’ 볶거나 ‘재빨리’ 볶으라고 한다. 써는 것 한가지도 ‘어슷어슷’, ‘숭덩숭덩’, ‘쫑쫑’, ‘나박나박’… 그런가 하면, 어떤 양념을 얼만큼 넣으라는 대신 ‘갖은 양념’이라고만 하고 시치미를 뗀다. 그렇다고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리된 음식은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내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적에 그 고장 특유의 음식을 맛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첫 일 년을 보낸 후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약 사십여 일 동안 유럽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여러 나라의 요리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서라면 굳이 먹지 않았을 텐데 불란서에 갔기 때문에 개구리 요리를 먹었다. 벨지움의 중세 도시 겐트에 나는 여러 번 갔는데 갈 적마다 그 도시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닭고기 스튜를 먹곤 한다. 그 요리는 우리가 흔히 먹는 백숙과 비슷해서 내 입맛에 딱 맞다.
생애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여성 ‘엠 에프 케이 피셔’(M. F. K. Fisher 1908년 ? 1992년)는 많은 수필을 남겼는데, 나는 특히 그의 음식과 관련된 글을 즐겨 읽었다. 일찍이 세네카(Seneca)가 말했듯이 ‘언제 살 것인가, 바로 지금이 아니라면?’을 피셔는 젊었을 적에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피셔에 의하면 ‘저녁 식사는 조금 늦은 시간에, 집안에 불을 환하게 켜고, 소수의 벗만을 초대해서, 오래도록 여러 코스의 요리를 함께 먹는다. 서로에게 열중해 있는 마악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손님으로 청하지 않는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런데, 요리는 누가?
외식을 할 적에도 무엇을 먹으러 갈까 생각해야 하지만 더군다나 집에서 ‘매일’ ‘아까’ ‘지금’ ‘이따’ 먹을 그리고 먹일 음식을 결정하고 또 손수 마련하는 것은 자칫 지루하거나 번거로운 일로 여겨지기 일쑤이다. 맛난 음식을 만들고 식구들을 잘 먹이고 싶다는 욕구가 클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간단한 음식을 즐겁게 만들고 즐겁게 먹는다. 바쁜 날에는 삶은 달걀 두 개도 훌륭한 한끼가 된다.
나의 어머니는 생애의 마지막 오 년 동안 저염식 내지는 무염식을 했어야 했다. 밥상에 오르는 모든 반찬은 간이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두 가지였으니 밥상이 복잡하기도 했거니와 식구들이 어머니의 젓가락을 은근히 ‘감시’하게 되는 것도 피차 못할 일이어서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는 독상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슬그머니 어머니 밥상으로 옮겨 앉아서 ‘엄마, 일본의 수도국장 이름이 뭔지 아세요? 그것도 모르세요? 무라까와 쓰지마!(물 아까우니 쓰지 마!)에요’라는 등의 ‘싱거운’ 소리를 하며 ‘싱거운’ 밥을 맛없게 함께 먹곤 했다.
먹고자 하는 의욕이 있고, 간이 알맞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다. 게다가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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