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토요일이 즐겁다. 누드 데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델들은 외국 여성과 남성인데, 친구 화가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거대하고 풍만한 육체를 집중된 에너지로 탐구하며 그리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마치 꽃이나 나무를 바라보듯 무심한 경탄으로 나체를 바라보며,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 하지만, 마치 예의를 차리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누드모델을 해온 듯한 모델들 중엔 깊고 우수에 찬 눈빛을 한 백인 여성, 늘 무심히 웃고 있는 듯한 흑인 여성, 인생의 밑바닥을 다 겪은 듯한, 날카롭고도 지친 눈빛을 한 초로의 백인 남성이 있다. 모델들은 3시간 동안 여러 포즈로 앉아있다가 소액의 모델료를 받고 떠난다. 완전히 집중해서 대상을 관찰하기에 드로잉이 끝나면 녹초가 되지만, 충일한 삶의 감각이 되살아나 석양의 주황빛과 연보랏빛 구름이 무척 깊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늘 운전하며 다니는 올림픽 가에서 할뭇 뉴튼(Halmut Newton 1920 ~ 2004) 사진전 배너가 눈에 띄어 아넨버그 사진 갤러리에 들렀다. 불온하고 위험한 듯하고, 무척 아름답기도 한 그의 패션 누드 사진들을 보며, 그는 왜 끝없이 어두운 주제에 매료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12살에 사진을 배웠던 스승이 아우슈비츠에서 죽고, 나치에 의해 아버지의 공장이 폐쇄되며, 가족이 유태인 수용소에 갇힌다. 18세에 부모는 칠레로, 그는 홀로 싱가포르로 도망가지만, 영국 관원에 의해 ‘적’으로 판명받아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되어 2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으로 복무하며 시민이 되고, 패션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그의 사진 작업에 깊이 연관되었을 듯하다.
나치 권력에 의한 가족의 생이별과 목숨 걸고 그의 도망을 도왔던 부유하고 화려했으나 불행한 엄마와의 이별이 그의 뇌리에 남긴 상처가 수퍼 모델들의 거대하고 창백한 어두운 이미지를 태동시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의 여신상처럼 고전적인 전라의 누드들이 외설 잡지의 한 페이지처럼 도발적이기도 하고 불온함과 비도덕성의 피해자들임과 동시에 위험과 위선의 권력을 고발하고 있거나 가학적 권력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패션 사진으로 시작하여 센티멘털하고 감각적이고 가벼운 소비 대중문화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당대의 패션 사진작가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어빙 펜(Irving Penn), 리차드 아베든(Richard Avedon)과 함께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진작가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순수예술(fine art)은 고결하고 고양된 정신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나에게, 프란시스 베이콘과 뭉크처럼 어둡고 무서운(?) 그림도 순수예술에 속하느냐고 요즘 나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우는 학생들이 물었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윤리의 문제에 봉착하고, 무엇이 윤리적인가를 의문하지만, 위험하고 불온한 인간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것도 순수예술에 속하고, 작가의 삶과 성향에 따라 인간 존재의 상황을 표현하는 자유를 중시하고, 윤리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남긴 세 권의 사진집(White Women, Sleepless Night, Big Nudes)에서 뽑은 사진들이 아넨버그 화랑에서 전시되고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만난 아내, 준 브라운은 영화배우이자 사진작가이고, 그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의 사진집을 편집하고 전시했다.
아내와 함께한 사진작가의 자화상<사진>을 보며, 거대하고 완벽한 몸매의 수퍼모델을 찍어 한 시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킨 극단적인 남편의 사진세계를 이해하고 그의 작업을 돕는 아내의 내면생활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은 센추리 시티, 애브뉴 오브 스타스에 위치한 멋진 아넨버그 사진 갤러리에서 다음엔 어떤 사진을 볼 수 있을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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